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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h J Dec 04. 2023

나에게 바다란..

대자연의 나라에 살고 있다.

가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장엄한 풍경을 마주하게 되면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청아한 옥색 레이크, 사람의 인공적인 개입이 전혀 없는 광활한 자연, 올려다보면 눈이 시릴 듯이 맑은 하늘과 3D 입체 구름들은 가끔 심장을 멎게 할 정도로 멋지다.

이번 여름에 방문했었던 존스턴 캐년 폭포에 갔을 때도 떨어지는 커다란 폭포 소리와 함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 하나로 합쳐지는 옥색 레이크의 웅장함에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계절마다 다른 밴프의 풍경은 또 어떻고.. 여름에 멋진 록키산을 배경으로 캠핑을 하고, 가을에 노란 larch 단풍을 바라보며 카나나스키스에서 등산을 할 때면 이렇게 아름다운 캐나다의 자연이 그대로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든다.


이렇듯 광활한 대자연을 품은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마음 한편에선 늘 한국의 자연을 그리워한다. 동네마다 있는 약수터, 오르락내리락 재미가 있는 아기자기한 등산로, 가을엔 빨강, 노랑 단풍으로 색색깔 화려해지는 산세들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또한, 캐나다의 레이크가 아무리 크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바다의 생동감 있는 느낌은 따라가기가 힘들다. 아쉽게도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 중서부에 위치한 캘거리 근교에는 강이나 레이크는 있어도 바다가 없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떠나올 때까지 40년 이상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바다는 늘 나를 설레게 하고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빠지게 한다.


바다와 인연이 많은 나의 추억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5살즈음 되었을까? 부모님이 광안리에서 여름 한철 장사를 하신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해변에서 수영복을 빌려주고 탈의실을 쓸 수 있는 간이 시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시설을 빌려서 딱 한해 운영하신 적이 있다 (두 번은 안한신 거 보니 잘 안 된 거겠지만..)

두 분이 같이 운영하며 바닷가에서 종일 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렸던 우리의 그해 여름은 바다가 놀이터요, 수영복은 사복 패션이었다. 엄마는 장사가 잘 안 돼서 고민이셨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자매와 오빠는 매일 바닷가에서 신나게 수영하고 하루종일 놀았던 기억뿐이다. 가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변에서 밤을 지새우며 거기서 잠을 자기도 했는데 깜깜한 해변을 사촌오빠 손을 잡고 걷다가 노을 진 하늘과 바다를 마주하고는 그 어린 나이에 살짝 감동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어떤 영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변에서 흑백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너무나 생생하고 멋진 경험이었다. 훗날 시네마천국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영사 기사였던 알프레도가 야외 영화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그때의 아련한 감정이 되살아났다.


고등학교 때는 소풍이 끝나면 집으로 가지 않고, 친구들과 우르르 바닷가로 몰려갔다. 모래사장에 앉아서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 부르고, 모래 섞인 라면을 끓여 먹던 사진은 지금 봐도 우습고, 재미있다.

고민이 많던 20대 때는 괴로우면 해변에 앉아 친구들과 같이 맥주를 마셨다. 하염없이 포말이 쏟아지는 파도를 바라보다 보면, 고민은 어느새 사라지고 속이 뻥 뚫렸다. 젊은 시절 바다에서 누군가의 고백도 들어봤고, 헤어짐을 경험해 본 곳도 바다였다.

남포동에서 바다로 장소가 옮겨지면서 더 낭만이 넘쳤던 부산 국제 영화제는 1회 때부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갔던 영화제였다. 한 번은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개막작으로 화양연화를 야외 상영했던 적이 있다. 철썩이는 파도옆에서 으스름한 달빛을 맞으며 커다란 야외스크린을 향해 반쯤 누워서 보던 양조위의 잘생긴 얼굴과 끈적한 화양연화의 OST는 평생을 잊을 수 없는 모멘토로 남아있다.

결혼 후엔 아이들과 함께 갔었던 영화제에서 모래 조각 전시회등 볼만하고 다양한 이벤트들이 많이 생겨 났었다. 캐나다에 와서 부산 국제 영화제를 10년째 못 가보고 있는 게 가장 아쉽다.


바다와 나의 인연은 신기하게도 30대 때 다녔던 회사와도 이어졌다. 회사 사무실이 남천동에서 해운대 바다 끝으로 이사 오면서 광안리와 해운대를 모두 거쳐왔다. 점심을 먹고 나면 여자동료들과 해변로를 함께 걷다가 돌아오는 루트가 점심 산책길이었고, 늘 창문너머 바다를 배경 삼아 일을 했었다. 

결혼하고 처음 남편과 우리 둘만의 힘으로 샀던 아파트도 해운대 신도시 아파트였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우리 아이들에겐 바다가 놀이터였으며, 바다옆 달맞이 고개가 아이들의 숲체험 현장이었고, 우리들의 산책로였다. 

금요일 저녁에는 아이들과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하루종일 모래놀이를 하다, 해무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바다를 감상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더운 여름이면 언니와 조카들과 함께 바다에서 신나게 수영을 하며 놀고 난 후, 달맞이 고개에 있던 바다가 보이는 해수온천에서 다 같이 목욕을 하고 5분 거리의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와 다 함께 시원한 밀면을 시켜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서울에 사는 지인들도 바다를 보고 싶다면 여름이든 겨울이든 매년 어김없이 해운대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알싸하게 시린 공기를 맞으며 바람과 함께 마주하는 겨울바다는 경외롭기까지 하다.

PIFF 부산 국제 영화제 행사때
해운대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

바다와의 추억이 많은 나여서인지, 캐나다 캘거리에서 처음 집을 살 때도 가능하면 부산 바닷가와 비슷한 느낌을 찾고 싶었고 모래사장과 함께 레이크가 있는 동네를 보자마자 끌렸다. 물론 바다와는 비교도 안되게 작은 인공 레이크였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언제든 모래놀이를 실컷 할 수 있고, 맘껏 수영할 수 있는 곳이어서 그것 하나만이라도 만족했다.


나에게 바다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엔 한없는 설렘을 안겨 주었던 곳이었고, 성장통을 앓기 시작한 젊은 시절엔 나의 고민과 내 안의 감정, 모든 응석을 다 받아 주었던 곳이었으며, 결혼 후에는 아이들과 차곡차곡 이쁜 추억 쌓아가던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보고 싶고 그리운 존재다.

해운대에 가면 하루종일 앉아서 파도소리를 듣고 싶다.


작년 여름.. 아버지를 해운대 바다에 묻어드리고 왔다. 9년 만에 찾아간 한국방문이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아버지는 평소 막내딸에게 표현은 잘하지 않았지만 늘 뒤에서는 내 자랑을 하시고 뿌듯해하셨다. 아버지를 바다에 묻어드리고 오는 길에 출렁거리는 파도와 함께  멀미처럼 내 마음이 슬픔에 요동을 쳤다. 보고 싶던 바다는 여전히 그곳이 있었고 비릿한 바다내음이 익숙한 듯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는 안 계시고, 내가 사랑하는 바다에 묻히셨다. 이제 내게 바다는 마냥 설렘의 존재가 아닌, 슬픔과 그리움이 함께 남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매년 8월이면 더 많이 생각날 아버지와 바다.

다음번엔 아이들과 함께 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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