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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h J Dec 18. 2023

나의 캐나다 이민 이야기 1탄

속담으로 풀어보는 이민 이야기

셋째 아이를 낳았을 때 남편은 두 번째 실직을 했다.

첫째를 낳은 이후부터는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올인하고 있던 내게, 남편의 실직은 커다란 위기로 다가왔다. 남편은 전공이 산업 디자인학과로 디자인 쪽 말고는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디자인 일은 못하겠다고, 그렇게 좋아하던 일을 포기해야 할 거 같다고 했다. 대학교 때 그렸던 작품이나 미술 노트 하나 버리지 못하는 남편의 미술에 대한 애정을 알고 있기에 제대로 꿈을 펼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렸지만 어쩌랴. 나는 새로운 일이 뭐가 되일단 도전해 보라고 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속은 타들어갔다. 그래도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랴..라는 마음으로.


편은 이참에 기술을 배워보겠다고 인테리어부터, 목수, 도배 등에 관심을 가지고 실직자를 위한 정부 보조 교육 프로그램 등을 알아보러 다녔다. 워낙 성실했던 남편은 교육을 받은 후엔 조금씩 일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이 40이 넘어서 시작한 새로운 분야의 도전은 힘들었다. 기능직 초보자에게 월급이 많을 리도 없었다. 당시 고생을 하도 많이 해서 남편 체중이 갑자기 10kg이나 빠졌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마냥 우리 집 통장 잔고도 남편 체중과 함께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평소 걱정을 길게 하지 않는 편이라는 것 정도? 어쨌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그쪽 방면 또한 디자인과 관련이 없지는 않다고 애써 남편을 다독여주었다.


힘든 순간을 겪던  바로 그 시기에 갑자기,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캐나다라는 나라가 운명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캐네디언과 결혼한 내 친구가 캐나다 할리팩스에 있는 시댁에 다녀와서 올린 카카오 스토리 사진 한 장에 그저 반해 버린 것이다. 그 사진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될 줄이야. 물론 여러 가지 상황과 이유들이 얽혀 있어서였겠지만, 나에게는 할리팩스의 광활한 바다 사진 한 장이 분기점이 되었고 그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이민이라는 꿈이 깨어났다. 사진 한 장으로 그런 마음을 먹을 수가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내가 이민 후 블로그에 올렸던  아이들 사진을 보고 (바람개비와 함께 잔디밭에 나란히 앉아있는 저 평범한 사진) 캐나다 이민을 결심했던 동생도 있었으니까. 


나는 아들 셋을 한국에서 낳았다. 아들이 셋이라고 하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라던지, 동메달도 아닌 목메달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것도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게다가 나는 부산에서 40년을 넘게, 같은 동네에서만 20년을 넘게 살았다. 나는 이 좁은 나라 한국에서 아들 셋을 낳은 죄를 지었고, 평생 부산 외에는 살아본 적이 없는 진정한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이제는 그 우물에서 나와야만 했다.


이민을 결심한 후엔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전혀 없었고 하나부터 열 가지 나 혼자서 이민을 알아보아야 했다. 몇 날 며칠 눈이 빠지게 이 방법 저 방법을 알아봤지만, 나이도 많고, 기술도 없고, 영어도 부족하고, 게다가 돈도 없는 우리 부부에게 맞는 방법들은 없었다. 수 천만 원을 요구하는 대행사들부터 대학에서 공부하며 영주권을 따는 방법 등등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안전하지 않았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마냥 무모하게 도전하기엔 나는 너무 안전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해도 맞는 방법이 나오지 않아 이대로 그냥 접어야 할까 생각도 했다. 포기하기 전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해외에 살고 있는 기술 이민자들이 모여있는 한 카페의 게시판에 내가 직접 남편에 대한 이야기와 캐나다에서 목수 일을 한번 배워보고 싶어 한다는 글을 올렸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마치 그동안의 내 노력들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캐나다 서스캐처원 주에서 건설업을 하시는 사장님이 직접 연락을 주셨다. 줄밖에 안 되는 짧은 메시지였지만 느낌이 달랐다. 캐나다의 목조 주택을 짓는 작은 건설 회사인데 마침 한국인 직원을 찾고 있으니,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면서.

그날은 마침 남편의 생일이었다. 생일선물로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었다.


사장님과 직접 전화 통화를 한 후엔 남편의 캐나다행은 한 달도 채 안 돼서 이루어졌다. 이름도 생전 처음 들어본 리자이나라는 도시였다. 혼자 있을 남편을 위해 노트북을 하나 사고, 곧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번 결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뒤엔 곧장 실행해야 하는 성격이라 지체하거나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원래는 3개월 정도면 워크퍼밋을 받을 거라 예상하고 떠났는데, 현지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연이 되었다. 결국 8개월 정도를 서로 떨어져 있게 되어 나 혼자 한국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지내야 했지만, 그건 다른 것에 비하면 식은 죽먹기였다. 3살 터울의 사내아이 셋을 차례차례 낳아 기르는 동안, 친정엄마는 일을 하던 언니를 대신해 언니네에서 조카들을 키워주고 계셨고, 디자인 회사에 다녔던 신랑은 늘 회사에서 밤샘근무를 하는 처지여서 나는 오랫동안 누구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의 독박육아에 익숙했다. 독박육아라지만 나는 아이들과 지내는 그 시간들이 좋았다. 집에서 다 함께 뒹굴거리다 목이 쉬도록 책을 읽어주고, sing along cd를 틀어놓고 함께 춤추고, 손으로 조물락조물락 모래놀이며 플레이 도우를 하고,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함께 먹고, 같이 바닷가나 공원을 산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시 오지 않는 제일 행복했던 순간들이다.


10월에 떠났던 남편이 다음 해 6월에서야 겨우 워크퍼밋을 받아 2014년 6월.. 나와 아이들도 캐나다로 완전히 해외이사를 하게 되었다. 남편이 우리를 위해 렌트로 잡아 놓은 집은 새 동네에 있는 새 타운하우스였다. 작지만 깨끗한 집이었다. 새롭게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리자이나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남편이 일하러 가면 나와 아이들은 한동안 차가 없어서 걸어서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새로운 식재료로 요리를 해 먹고, 집 앞 공원에서 눈이 부시도록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잔디밭에서 종종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그렇게 잔디밭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곳은 지천이 잔디밭이다. 여름에 길을 걷다 비가 오면 비를 피할 곳도 전혀 없는 동네여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어서 집에 돌아오곤 했는데 아이들이 그걸 그렇게 재미있어했다. 또 비 맞으러 나가자고.. 걷다가 하늘을 보면 3D 입체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고, 그런 하늘은 내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왔. 집에서는 아이들과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땀 흘리며 신나게 춤추고 노래했다. 그래서인지, 막내는 아직도 가끔 리자이나를 그리워한다.


다행히도 남편은 캐나다에 와서 10년째 목수로 일하고 있으며, 그 일을 하며 영주권도 받았다. 공든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동안 쌓아왔던 노력의 결실이 이제야 조금씩 눈에 보이니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다는 걸 느낀다. 처음 낯선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난관들이 많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이제는 정착하여 캘거리에서 조그마한 하우스도 사고, 남편도 제법 높은 임금을 받으며 캐네디언 회사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도 이제는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 역시 진리다. 당시엔 마흔이 넘어서 한 이 도전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생각도 했었지만, 뒤돌아보면 그때 우리는 너무나 청춘이었다.


"어쩌다 보니" 캐나다에 와서 살고 있다.

10년간의 이야기는 많은 굴곡을 거쳐 다행히 해피엔딩이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내 삶에 앞으로도 큰 파도는 없길 바라지만, 괜찮다.

그때도 "어쩌다 보니" 또 이렇게 살아지고 있구나 하게 될 테니 말이다.



글쓰기 리더가 여러 가지 속담들을 던져주고 그중 하나를 골라서 써보라고 했던 것이 주제였다. 어떤 걸 골라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뭐든 이야기를 써내려 가다 보면 해당되는 게 나오겠지 하고 무턱대고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속담 10가지가 이곳저곳에 들어갈 위치가 생긴다.
세상만사 인생은 비슷하게 굴곡이 있고, 비슷한 교훈들을 배우게 되니, 어쩌면 어떤 글에 집어넣어도 맞아떨어지고 어색하지 않을 거 같다.
속담이 바로 우리 인생인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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