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아주 어릴 때의 내가 먼저 생각난다.
내가 어렸던 70-80년대는 지금처럼 먹을 것이 풍족하고 다양하던 때는 아니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4살 때에는 사탕에 커다란 설탕입자가 표면에 붙어있는, 입에 넣으면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로 볼이 불룩 튀어나오는 왕사탕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거 하나만 입에 넣고 있어도 그날은 기분이 최고였다.
유치원 다닐 즈음 겨울에는 엄마가 옆집 슈퍼마켓에 데리고 가면 주인아주머니께서 난로가에 앉아 계시다가 따끈한 호빵을 꺼내주시고 서울 우유에서 나왔던 삼각 쵸코 우유의 비닐팩 끄트머리를 잘라 빨대로 꽂아 주시곤 하셨다. 따뜻하게 데워진 유리병에 담겨 나온 흰 우유도 자주 먹곤 했는데, 입구의 종이 뚜껑을 떼어내면 퐁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그 맛있는 우유들이 내 추억의 한편에 남아 있다.
집안 경제가 좀 좋아졌을 때는 간식의 질도 달라진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의 경제가 그나마 꽃 피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유치원을 다니던 때부터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였던 거 같다. 딱 그때까지가 끝이었지만 ㅎㅎ
형제 중 유일하게 내가 유치원이란 곳을 다녀본 걸 보면 그때는 사정이 좀 좋았었나 보다.
그 당시에 우리는 전세를 줄 수 있는 방이 딸린 작은 양옥집을 구입했던 때였는데, 부모님의 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나서는, 그 집을 팔게 되었고 다시 전셋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나의 풍요로움은 끝이 났다.
엄마의 마음도 경제와 함께 풍요로웠던 그때는, 엄마가 철마다 포도를 궤짝으로 몇 상자씩 사가지고 오셔서 연탄아궁이에 커다란 가마솥을 올려놓고 포도를 넣고 큰 주걱으로 휘젓던 모습이 생각난다. 시큼한 냄새가 풍겨져 나오는 포도로 잼을 만드는 걸 그때 처음 보았는데, 솥에 담긴 포도를 계속 으깬 후 설탕을 넣고 아주 오랫동안 저으셨다. 생각보다 오랜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살짝 뻑뻑해지면 맛있는 포도잼이 완성된다. 열탕 소독한 유리병에 포도잼을 담아 작은방 찬장 안에 빽빽이 넣어 두셨는데, 출출할 때면 옥수수 식빵에 엄마가 만든 포도잼을 발라 먹으면 세상을 다 품은 것 마냥 맛있고 좋았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는 엄마의 간식이 더 업그레이드되었는데, 엄마는 당시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카스테라를 구울 수 있는 전기 쿠커를 외판원에게서 구입하셨다. 그때 집집마다 그 쿠커가 있었던 덕에 카스테라 맛 한번 안 본 집이 없었을 듯하다. 나는 그때 먹었던 카스테라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카스테라를 만드는 날 아침이면 언니랑 내가 엄마의 조수가 되는 날이다. 계란이 어찌나 많이 들어가는지 거의 한판이나 되는 계란의 노른자와 흰자를 깨서 분리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그리고는 흰자가 하얀색 크림처럼 될 정도로 거품을 내서 만들어줘야 하는데 지금처럼 핸드믹서가 없던 때이니 거품기로 팔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휘저어줘야 한다. 내가 거품을 치다가 너무 팔이 아프면 언니한테 넘기고, 언니가 힘들면 내가 볼을 받아서 또 거품기로 돌리고 그랬다. 그리고는 볼을 거꾸로 들었을 때 하얀 크림이 그대로 볼에 고정되어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가 되면 성공이다. 그때 언니랑 내가 흰자로 열심히 만들었던 게 "머랭"이었다는 걸 성인이 된 후 베이킹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가 만든 머랭에 노른자와 밀가루를 잘 섞어 설탕이랑 소다, 우유도 넣고 동그란 전기팬에 반죽을 넣고 찌면 정말 크고 두꺼운 카스테라가 완성된다. 머랭이 잘 쳐진 날은 더욱 폭신한 카스테라를 맛볼 수 있다.
머랭을 치느라 팔은 엄청 아팠지만 맛있는 카스테라를 먹을 생각에 설렘반 기대반으로 빵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드디어 카스테라가 다 만들어지면 온 집안에 빵 냄새가 진동을 한다. 엄마는 피자처럼 칼로 8등분으로 큼직하게 잘라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한 조각씩 나눠 주셨다. 그런 날은 동네 아이들도 우리 집으로 와서 한 조각씩 들고 먹곤 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오래전인데도 그 향기, 맛과 카스테라의 모양 등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엄마에게 카스테라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팔이 아픈 걸 마다하지 않고 계란반죽을 하면서 빵을 만들던 그때가 나의 유년시절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언젠가 그때 그 카스테라와 비슷하게 오븐에 구워 만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때의 맛과 똑같지는 않았다.
우리가 전셋집으로 이사를 간 이후로는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그 카스테라를 더 이상 맛볼 수 없었다. (쿠커를 파셨던 걸까?)
그 이후의 엄마표 간식은 감자를 강판에 열심히 갈아 밀가루를 전혀 넣지 않고 소금만 살짝 넣어 그대로 구운 고소한 감자전이었고, 가끔 미숫가루를 빻아오시는 날에는 얼음과 설탕을 넣고 잘 저어서 숟가락으로 떠먹던 미숫가루 탄 음료가 우리 집의 대표 여름 간식이었다.
간식을 떠올려보면 그때의 그 시절 감성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 같아서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그 간식을 먹던 그 순간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추억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나처럼 이 카스테라를 기억하고 그때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먹는 것이 넘쳐나는 요즘을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간식이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지 참 궁금하다.
오늘.. 엄마에게 카스테라 레시피를 다시 한번 물어봐야 할 거 같다.
엄마가 기억하고 계실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