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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리 Mar 25. 2019

걸어가는 이야기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으며 옛 일기장을 펼쳐본다.

배우이자 작가인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었다. 나도 걷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일을 그만두고 시간이 많아지면서 되도록이면 많이 걷자-고 생각했던 차였다. 독자평도 좋았고 하정우라는 배우의 걷기 예찬을 들어보고자 고민 없이 책을 주문하였다.


걷기의 매력 중 하나는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주로 실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정신없이 바쁜 날에는 오늘 날씨가 흐렸는지 맑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도 생명체인지라 날씨의 변화, 온도와 습도, 햇빛과 바람을 몸으로 맞는 일은 중요하다.

하정우 <걷는 사람, 하정우>


돌이켜보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도 못하고, 달리기도 빠르지 않았다. 오래 달리기를 하다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참고 더 나아가는 인내심도 없었다. 다만 몸에 비해 조금 더 굵고 튼튼한 다리와 키에 비해 조금 작은 발은 세상의 길을 걸어 다니는 데 충분하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것을 꽤 즐긴다는 것.

그 사실을 스무 살 첫 배낭여행 때 알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면서 약 7년 동안은 많이 걷지 못했다. 핑계는 물론 존재한다.


첫 번째 내 터전이었던 두바이에서 일을 할 때는 너무 덥고 바빠서 걸어 다닐 엄두는 당연히 내지 못했고,

두 번째 내 터전이었던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는 너무 위험하다고 해서 걷지 못했고,

세 번째 내 터전인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는 택시비가 싸다는 이유로 택시만 열심히 타고 다녔다.


그러다 자연이 그립고 다리가 뻐근해지면 나는 안전하고 날씨 좋은 곳으로 휴가를 떠났다.


작가가 단지 걷기 위해 하와이로 날아갔듯, 나는 걷고 볕을 쬐기 위해 발리로 떠나서 걸었고, 5월이 되면 휴가를 내고 한국에 가서 걷고 봄기운을 느끼며 꽃구경을 하기도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길 끝에서 허무함을 느낀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걷기가 주는 선물은 길 끝에서 갑자기 주어지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내 몸과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진 것들은 결국 서울에서 해남까지 걸어가는 길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길 위에 매 순간이 좋았고, 그 길 위에서 자주 웃었다. (중략)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하정우 <걷는 사람, 하정우>


이 부분을 읽는데 스물네 살이었던가, 2010년 봄과 여름 사이- 10일 동안 스페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던 때가 살며시 떠올랐다.

나는 당시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었는데 방학을 이용하여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짧게나마 걷고 싶었다. 이십 대 초반의 치기 어린 생각이기도 했다. '한 달 동안 그냥 길을 걷는다고? 왜? 한 달 동안 걸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 내게 어떤 변화가 생길까?' 하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호기심이 나를 길 위로 이끌었다.


당시 내 주머니에는 프랑스로 돌아갈 기차표 값만 남은 상태여서 어쩔 수 없이 10일 만에 돌아와야 했지만 그 경험은 꽤나 강렬했다.


일단,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10일 후 내게 남은 건 베드 버그가 주르륵 지나가 퉁퉁 부운 다리와 푸석해진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길을 걷는 도중에는?

50리터 배낭에 최소한 필요한 물건만 넣어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들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고 길을 걸으며 내 머릿속에 든 생각과 상상은 굉장히 단순했다.


1. 아, 진짜 힘들다.

2. 한 발자국 오를 때마다 배낭 속 물건을 하나씩 버리는 상상

3. 아, 진짜 힘들다.

4. 나는 아직 젊어. 힘내서 걸어가렴.

5. 아, 진짜 힘들다.

5. 배낭 속 물건을 버리는 상상...

6. 아, 진짜 힘들다.

7. 사람마다 걷는 속도는 달라. 네 속도에 맞게 걸으렴 (결국 60대 독일 할머니가 내 동행이 되었다.)

8. 아, 진짜 힘들다.


이 생각들의 무한 반복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니 가장 힘든 길을 가고 있을 때 열정과 생생함으로 반짝 거리는 사람들을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힘들어서 사진도 거의 못 찍었던 피레네 산맥을 한 발자국 씩 올라가며 형형색색 바뀌는 주변의 풍경과 공기는 그 어느 곳 보다도 아름다웠고, 내 몸과 마음의 소리를 가장 많이 듣고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다리가 아파, 가방이 너무 무거워, 여긴 참 더워, 이곳은 추워, 진흙이 많아,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이렇게 멀어, 배고파, 목말라, 하늘이 예뻐, 햇살이 참 따뜻해, Hello, Thank you. 오래전부터 원했던 여행이에요. 고요해, 선선한 바람이 부네, 사람들이 미소가 좋아, 힘들지만 내 몸의 속도를 존중해야지.. 하던 시간들.

생생한 감정의 덩어리가 가득한 시간들이었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하정우 <걷는 사람, 하정우>


스물여섯 여대생의 일기에는 스물네 살 때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던 날을 추억하며 이렇게 적혀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처음부터 편한 길로 갈 수는 있겠지만, 때로는 힘들었던 길을 올라가며 보고 배우고 깨닫는 경험은 결코 하지 못할 거라고.
난, 솔직히.....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면...
배낭 하나 들쳐 매고 내 두 다리로, 내 두 발로 전 세계의 길을 걸어보고 싶다. 그리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과 눈인사하고.. 가끔 맛있는 것도 먹고 온몸으로 삶과 세상을 느끼고 싶다.

그러면서 내 배낭은 점점 더 가볍게,

가슴과 머릿속은 단단하고 섬세하게 엮인 레이스처럼 완성되어 갔으면 좋겠다.

<스물여섯 레아리의 일기장>


그리고 지금, 서른셋이 된 나는 여전히 낯선 곳을 내 발로 둘러보고 싶고 (하지만 편안 내 공간은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고), 여전히 가볍게 살고 싶고 (그래도 원피스와 운동화는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사고 싶고), 여전히 글 쓰고 그림 그리며 살고 싶다(그래도 웬만하면 몰스킨에 쓰고 싶고).


그리고 나는 그때에 비해 몸이 조금 더 무거워졌지만,

또 조금 더 유연해졌다.


여전히 걷는 것을 좋아하고 걸어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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