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부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시간 부자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맡았던 프로젝트는 다행히도 무사히 잘 끝났다. 그리고 쿠알라룸푸르에서 3년 9개월을 다녔던 회사에 작별을 고했다.
너무 바쁜 나날과 스트레스가 넘쳐나는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나는 시간 부자가 되고 싶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나 업무 자체는 괜찮았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고 메신저와 전화 연락이 많은 업무의 특성이 내 성격과 맞았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일을 할 때면 다행히도 '일하는 자의 가면'이 별다른 노력 없이도 구동되었기 때문에 (물론, 밤낮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클라이언트의 메시지는 다른 이야기지만..) 스트레스의 근원은 아니었다. 광고회사의 특성상 야근도 많았지만 뭐, 괜찮았다. 어차피 가족도 친구도 없는 타지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언제나 바쁘게 돌아가는 프로젝트도 스트레스와 쾌감을 동시에 주는 존재였다.
휴가 막바지에 가면 빨리 일하러 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던 날들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가족들과 밥을 먹으면서 쉴 새 없이 울리는 업무 메일을 확인하던 날들이 있었다.
프로젝트 데드라인만 달력에 기록해두고 구정과 부모님 생신을 까먹고 연락을 못 드린 날들도 있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조금 달라졌다. 쉬어도 쉬지 않은 느낌, 요가도 매일 하고 싶고 읽고 싶은 책도 많은데 내 시간은 너무 짧다는 느낌이 점점 커져갔다. 일은 여전히 재밌었지만 내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이 더 행복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퇴사하고 뭐 할 거야?
스스로 자문했다.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나는 부유한 은퇴자의 생활을 즐겨야지”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만들어졌다.
내게 있어 부유한 은퇴자의 생활이란, 돈 걱정이 (많이) 없고 -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으며 걱정거리나 신경 쓸 거리가 (많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은퇴 후 ~를 하고 싶어, 은퇴하면 ~ 해야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비단 인터넷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아직까지 일 중독자처럼 일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 그 말을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묻곤 했다. 은퇴하면 뭐 하고 싶어? 답은 항상 비슷했다. 여행하고 운동하고 등산가고 사우나 가고... 할 건 많지.. 사실 거창한 건 없었다. 타인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일상을 누리고 쉬고 싶다는 말이었다.
신용카드도 없고, 집도 없고, 차도 없고, 결혼도 안 했고, 돌볼 사람도 없고 - 무엇보다 매달 내야 하는 돈(빚)이 없는 2018년의 나는 부유한 은퇴자의 생활을 더 빨리 해볼 수 있겠다, 50-60살 때까지 그걸 미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날이 있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도 일을 하고 싶다.)
엄마에게 질문을 하면서 나도 내가 은퇴 후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보았다.
돈 걱정이 (많이) 없고, 시간이 많으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보니 굳이 은퇴를 기다리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이 많이 들지 않는 것 들이었다. 내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에 돈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면 굳이 20년을 더 미룰 필요가 있겠나, 라는 생각이 들자 하루라도 빨리 경험해보고 싶었다.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돈을 엄청 많이 벌었던 것도 아니기에 그 교환을 잠깐 멈추는 것이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엄청난 스트레스로 두들겨 맞은 시간 후에 맛보는 짧은 휴가처럼 자극적이고 짜릿한 행복은 없다. 하지만 내가 그리던 일상에 채색을 하며 보내고 있는 중이고 길든 짧든 이 시간을 즐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