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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7. 2022

[꼭 뭐가 되어야 할까?] #3

이제부터 나는 나로 살 것이다

10대에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뭐라도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20대엔 ‘남들이 알아주는 무엇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30대엔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정도는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글쎄, 적어도 ‘죽을 때 아주 땅을 치며 후회하거나 뒤돌아 볼 일은 만들지 말자’는 생각 정도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무엇이 되거나 뭔가 남겨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의 시작은 어이없게도 누구나 알 만한 속담 한 줄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고로 사람인 나는 이름을 남겨야 마땅했다.


60권 위인전의 무게


어린 시절 우리 집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전집류 중에는 <한국 세계 위인전>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드커버 장정에 한국 위인전은 노란색, 세계 위인전은 흰색 종이 케이스에 들어 각각 30권씩 고급스러움을 과시하며 무게를 뽐냈다. 부모님이 그 위인전집을 집에 들이시던 날, 그걸 책장에 꽂는 건 내 몫이라며 방 안에 책 네 박스를 턱 놓고 가셨다. 그 책들을 한 권 한 권 옮겨 책장에 꽂으며 나는 ‘세상엔 훌륭한 사람이 참 많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사람이니 어떻게든 이름을 남기긴 남겨야 할 텐데 걱정이 되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위인전집 독파에 돌입했다. 내가 과연 이들 중 누구처럼 살아야 위인전에 이름을 올리고 죽어서도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한국의 첫 번째 위인은 단군왕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요즘 위인전에는 반기문이나 김연아, 스티브 잡스나 스티븐 스필버그가 나온다는데 건국 신화의 주인공이 위인전에 실리다니 정말 옛날이야기다.


어쨌거나 단군왕검으로 시작해 김유신, 강감찬, 이순신 등 수많은 장군이 등장했다. 학자적 명망으로 1, 2위를 다투었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왕 중의 왕 세종대왕, 대한 독립이 소원이었던 김구 선생, 만세 운동의 대명사 유관순 누나 등등 역사 속 무수한 인물들의 일대기를 읽으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내가 무슨 수로 이들 같이 훌륭한 삶을 산단 말인가!


이제 와서 나라를 세울 수도 없고, 문자를 창제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고, 위인 한번 되겠다고 다시 전쟁이 나길 바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세계 위인으로 시야를 넓혀 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전기와 페니실린이 일찌감치 발명되어 상용화되었고, 미키마우스나 디즈니랜드도 이미 다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거랑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게 어떻게 같은 일이냐며 비로소 속담을 탓하려던 찰나, 어쩐지 만만해 보이는 업적을 남긴 위인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일제강점기 사회사업가였던 백선행 할머니였다. 한국 위인전 중 맨 마지막인 30권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백선행 할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생전에 자선사업과 육영사업에 전 재산을 내놓은 걸출한 여성 사회사업가로 이미 명망이 높았던 분이고, 사후에는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사회장이 거행되었을 만큼 훌륭한 어른이었다.

평생을 근검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셨구나! 할머니의 착한 일 중 하나는 어느 마을에 돌다리를 놔준 것이었고, 할머니 이름을 따 그 다리를 ‘백선교’라 불렀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60권에 달하는 한국 세계 위인 전집을 다 읽고도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위인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날 때부터 비범했거나(옆구리에서 태어나든, 하늘이 세 번의 질문을 던지고 태어나든), 어린 시절 성장 과정부터 남달랐기에(매우 천재적이거나 엉뚱 발랄하거나 하다 못해 힘이라도 장사이거나) 지극히 평범한 어린이였던 내가 감히 롤 모델로 삼기에는 너무 먼 위인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백선행 할머니처럼(이름부터 어찌나 착한 분이시던지) 위인전집 맨 끄트머리에라도 이름을 올리려면 착하게 살면서 근검절약하여 죽기 전에 이 세상 어딘가에 내 이름을 단 다리라도 하나 놓으리라 다짐했다. 후세에 이름이 남을 정도로 ‘착하게’ 사는 게 그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모르던, 철없고 순수하던 시절의 기억이다.


오십에 화들짝 든 생각


남들이 다 알아주는 무엇이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도 당연한 일도 아니건만, 그렇게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는 알 수 없는 죄의식 혹은 부채의식을 갖고 살았던 것 같다. 고백하건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종종 그런 죄의식으로 스스로를 닦달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노라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특별히 나태하지는 않았던 나의 근면 성실했던 시간은 무의미했던 것일까?


나는 이대로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로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꼭 뭐가 되어야만 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는 없었다. 대부분의 깨달음이 그러하듯 그냥 화들짝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하고 보니 나는 오십이라는 믿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냥 이대로 살아도 좋지 않을까?


아무것도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나’로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이 뭐 그리 대단한 대의명분으로 가득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 각자의 삶에서 대의명분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충분함이 아닐까?


어린 시절 내가 읽은 60권짜리 위인전집에 실린 위인들도 뭐가 되기 위해, 혹은 위인전에 이름을 올리려고 처음부터 작정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그 화려한 업적도 각자의 삶과 시대에 충실했고, 그 선택에 스스로 책임지며 묵묵히 견디며 일상을 충분하게 살아온 결과일 뿐이지 않을까?

그들은 그렇게 그들로 살았고, 이제 나도 나로 살 것이다.  


다시뉴스 필진 정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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