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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7. 2022

[중년이라 방방곡곡] #3

기 센 볼리비아 사람들

공항에서 오지 않는 짐가방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자니 지겨워졌다. 우리는 시내로 어슬렁어슬렁 내려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Basilica de San Francisco) 앞에서 모인다는 시티 워킹 투어를 기다렸다. 여행사 조끼를 입은 사람이 다가와 오늘의 가이드가 곧 도착할 것이라면서 그때까지 모인 사람이 한 팀이 되어 투어를 떠날 것이고 참가비는 1인 당 20 볼리비아노(당시 약 3,300원)로 가이드에게 직접 주면 된다고 안내했다.


영어를 썩 잘하는, 잘 생긴 의대생이 가이드로 왔다. 그런데 손님이 우리뿐이다. 오늘 일당이 너무 적어서 어떡하나 걱정하며 눈치를 봤는데 그 청년은 용돈을 벌자고 이 일을 하는 게 아니었던 듯하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와 모국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올바른 소개를 하고 싶어 하는 열정이 넘쳤다. 그에게는 이렇게 할 말이 많은 이곳을 고작 우유니 사막으로 가는 통로인 양 가볍게 여겼다니… 미안한 마음에 우리는 더 열심히 쫓아다니며 열심히 메모하고 끄덕여주었다.


영험한 눈매의 마녀들 


가이드에 따르면, 우리 숙소 바로 위에 위치한 마녀 시장의 '마녀'들은 예부터 주술과 의술을 행하던 사람들이다. 선택된 자들이란 인식이 강해서 아직도 지역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고 본인들도 자신의 정체성에 자부심이 강하다고 한다. 지대가 높은 라파스에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급작스럽게 날씨가 바뀌어 소낙비가 왔다가 천둥번개가 쳤다가 다시 맑아지고는 하는데, 번개를 맞아 마녀의 능력을 갖게 된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고 한다. 전기 쇼크로 인해 미래를 내다보게 되거나 상서로운 비전을 갖게 된 셈인데,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마녀가 되면 딸들도 보통 대물림을 해서 마녀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 마녀들은 대를 물리는 일이 없다고 한다. 


마녀들은 현재 시장에서 다양한 약재를 팔면서 토착민들의 믿음을 반영하는 물건들을 같이 팔고 있다. 지금도 라파스 사람들은 새로 건물을 짓거나 할 때 사산된 라마 새끼 말린 것을 제물로 삼아 소망하는 것을 상징하는 물건과 함께 태워서 연기를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눈매가 영험한 할머니 마녀들과 눈이 마주칠 때가 종종 있는데, 그저 상점이나 지키는 늙은 상인은 아니란 것을 알겠다.


의식에 사용되는 물건을 설명하는 가이드 (사진: 박승숙)


오늘 나는 사진 찍어도 돼요 


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촐리따(Cholita)'라고 부르는 특이한 복장의 여성들을 자주 보게 된다. 16세기에 볼리비아에 당도한 스페인 여인들의 의복을 흉내 낸 것이라고 한다. 당시 유럽에선 귀부인이 페티코트로 잔뜩 부풀린 드레스를 입고 장식이 높이 달린 모자를 썼다.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그 부유한 이방인들이 선망의 대상이었을 터. 너도나도 그들의 모습을 모방하려고 애쓰다가 볼리비아 고유의 독특한 복장이 탄생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시장에서 흔히 만나는 촐리따 복장의 여인들


시장 가판대 아주머니부터 부유층의 여성들까지 누구나 촐리따를 입는다. 비싼 것은 상상도 못 할 만큼의 가격이라는데 워낙 금광이 많았던 볼리비아라서 돈 많은 여성들은 금을 둘러 화려하게 장식한 촐리따를 입는다고 한다.


시장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하니 여성들이 유독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다. 가이드 왈, 오늘 자신의 복장이 최선이 아니라서 창피해서 사진 찍히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몇 명은 기꺼이 카메라 앞에 서주었는데, 오늘 최고로 뽐내고 나와 자신을 과시할 의향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볼리비아 라파스 축제의 한 장면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노조 파워 


라파스 시장 거리에는 상품 품목이 동일한 가게와 가판대가 옹기종기 몰려 있다. 보통은 생산자와 상인, 상인과 고객이 단단한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 의리를 지키며 거래를 유지해서 고객 유치에 열을 올리는 과도한 경쟁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과일을 몇 개 사려고 지갑을 꺼내니 가이드가 과일과 야채를 파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산품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으니 절대로 값을 깎으면 안 된다고 귀띔해주었다. 값을 흥정한다는 건 '당신의 상품이 값어치가 없어 보인다'는 메시지이므로 차라리 제값을 내고 "조금 더 얹어주세요" 해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상인이 미소를 띠며 기꺼이 몇 개를 더 넣어준다.


볼리비아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이곳에는 모든 직업마다 노조가 있고 툭하면 파업에 들어가고 데모를 하는데 정부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영향력이 강력하다고 한다. 노조원들이 똘똘 뭉쳐 공기관에 압력을 행사할 때 시위에 동참하지 않거나 딴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자리를 빼서 다른 노조원을 앉혀버리기 때문에 모두가 한 마음으로 노조의 움직임에 발 빠르게 맞춰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시장의 작은 가판대 할머니조차도 노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정치 돌아가는 상황을 빤히 알고 있고 그런 쪽으로는 너나 할 것 없이 영민하다는데 그래서 그럴까? 라파스 시장 사람들은 어쩐지 더 당당해 보이고 기도 세 보인다.


여태 나는 라파스가 볼리비아의 수도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이드 말을 들어보니 ‘사법 수도’는 수크레(Sucre)고, 라파스는 정부 기관들이 모여 있는 ‘행정 수도’라고 한다. 과거에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수도로 대통령이 살고 있고 행정 기관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은 라파스지만, 독립을 가장 먼저 선언했고 사법 기관들이 하나 둘 세워진 수도, 즉 볼리비아 사람들의 마음속 진정한 수도는 수크레라는 것이다.  


남미의 전라도, 볼리비아 


남미 역사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던 무지한 내 귀에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혁명을 주도한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볼리비아란 이 나라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남미의 북쪽, 현 베네수엘라 땅에서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던 스페인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주민 유모 밑에서 그녀의 자식들과 함께 뛰놀면서 한 형제처럼 자란 그는 라틴 아메리카를 제 고향으로 알고 컸다. 장성해서 본국인 스페인에 유학을 간 그는 친구들이 자기를 촌뜨기라고 놀리자 그제야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 스페인 사람들이 라틴 아메리카를 무시하며 엄청나게 착취해왔다는 걸 뒤늦게 인식하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볼리바르는 라틴 아메리카 전체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독립군을 모아 스페인에 맞섰고 베네수엘라를 위시해 한 지역씩 차례로 독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스페인의 세력을 몰아내고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적 자원을 독점하려는 흑심을 품은 영국이 볼리바르의 뒤를 소리 없이 지원해준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볼리바르가 금광 등 볼리비아의 자원을 빼돌릴 수 있게 협조하지 않자 영국은 그의 이동 경로를 스페인 군대에 흘려 볼리바르가 암살당하는 데 일조했다.


볼리비아는 현재 칠레와 몇 년째 국제 소송 중에 있다.  전쟁에서 이겨 과거 볼리비아 땅이었던 해안 쪽 땅을 점유하고 있던 칠레가 일정 기간까지 그 땅을 돌려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칠레 입장에서는 그 땅을 돌려주면 나라가 두 동강이 나는 셈이니 미국을 등에 업고 자꾸 시간을 지연시키는 모양. (이 이야기를 들은 시점에서 1년 뒤 결국 볼리비아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칠레와의 영토 분쟁에 있어 패소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볼리비아는 미국과 사이가 더 나빠졌고 소련과 유대를 더 돈독히 하고 있다고 한다.  


안데스 산맥이 동서를 나누며 관통해 지나가는 바람에 동쪽과 서쪽이 자유롭게 왕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브라질,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등 남미의 대국들이 빙 두르고 있는 볼리비아는 중남미 21개 국가 중 바다를 보지 못하는 내륙국가 2곳 중 한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리적으로는 충청북도 같은 느낌. 하지만 볼리비아 사람들의 정치적 인상으로 보면 어쩐지 남미의 호남이나 광주 같은 면모가 느껴진다. 


엘 알토 행 330원짜리 케이블카 


볼리비아의 지리적 특성이 그러한데 유독 이곳 라파스는 협곡에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 동서남북 각 지역으로 이동이 쉽지 않고 한 번에 이동도 어렵다. 협곡의 저지대에는 부유층이 차지하고 있고, 가난한 이들은 점점 더 살기 어려워져서 고지대로 쫓기듯 올라가고 있다. 그렇게 건설된 주거지역이 공항이 있는 엘 알토이다. 라파스 인구가 81만 명으로 집계될 때 엘 알토 인구는 백만을 넘었다고 들었다(2017년 기준).   


엘 알토로 오르는 길은 그 수가 많지도 않지만 오가는 차량이 워낙 많아서 늘 교통 정체가 심하다. 원래는 기차가 있었다는데 사람들이 비싸서 잘 타지 않아서 적자로 문을 닫았고, 시험 삼아 케이블카를 건설했는데 시민들의 호응도가 높아서 현재는 노랑, 빨강, 녹색, 파랑 등으로 노선이 늘어나 있고 여전히 새 노선을 건설 중이다. 교통비가 엄청 싸서  편도에 고작 2 볼리비아노, 우리 돈으로 약 330원 정도다. 


라파스 전역을 아찔하게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에 관광객도 구경 삼아 탈 만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보이는 건물들이 다 고만고만 비슷하게 생겼는데 자세히 보니 집을 짓다 만 것 같이 방치되어 있다. 준공이 나면 세금을 많이 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세금을 안 내려고 사람들이 그렇게 마감을 안 하고 사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겉만 그럴 뿐 안에는 살 만큼 다 꾸미고 살고 있다고 한다. 



시내 아래 소포카치(Sopocachi)는 부자 동네다. 마침 그 위로 케이블 카가 지나가서 내려다보니 정말 집들이 으리으리하다. 자기네들 속사정이 다 보인다고 부자들이 케이블 카 건설을 엄청 반대했다고 하는데, 결국 이렇게 케이블카가 지나가게 되어 그들의 사는 모양새가 모두에게 노출되고 있다.


케이블카는 노선 하나 정도만 타보면 족하다. 라파스보다 훨씬 더 매연이 심한 엘 알토에서 다른 노선의 정거장으로 이동하려고 차편을 알아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우리는 멋모르고 봉고차 버스를 기다렸는데, 남미의 많은 국가에서 그러하듯 여기서도 개인이나 작은 민간업체가 봉고차를 소유해서 사람들을 태우고 다닌다. 버스 정류장 표시도 딱히 없는 데서 타고 내리기 때문에 그 지역을 잘 아는 사람만 타고 다닐 수 있다. 행여 빈자리가 뒤에 있으면 문 옆의 앞 좌석에 타고 있던 사람이 내려서 의자를 제쳐 통로를 열어줘야 하기 때문에 타고 내리기가 번거롭고 대부분의 봉고가 낡고 더러워서 탑승이 유쾌하지도 않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인 코로나 시국에 돌아보니, 마스크를 써도 봉고 버스는 방역 면에서 안전하지 않겠다.  


사건 사고는 끝나지 않았다 


봉고 버스까지 타고 정류장을 옮겨 다니며 세 개 노선의 케이블카를 타고 오니 우리 부부는 완전 녹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오니 드디어 우리 짐가방이 공항에서 도착해 있었다. 이제 새 옷을 꺼내 입을 수 있게 된 우리는 삼일 만에 처음으로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러나, 라파스에서의 사고는 사실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뉴스 발행인 박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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