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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7. 2022

[크크의 다시 읽기] #6

사실은 사실일 뿐이고

‘보이후드’라는 미국 영화를 재밌게 봤다. 우리에게 유명한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를 만든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작품으로, 6살 남자 주인공의 12년간 성장기를 아역 배우가 커가는 모습 그대로 담아낸 것이 인상적인 영화다.


솜털 보송한 꼬마에서 흑변 하는 모습을 거쳐 그럴듯한 청년으로 자라기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소년의 성장기에서 그런데 내 기억에 남은 대사는 정작 엉뚱한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아들이 집을 떠나는 날 싱크대 앞에서 울부짖는 엄마의 한 마디, “이건 아니야!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당연히 그렇다! 지독히 허무하다. 그러나 허무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그래서 무의미하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완전히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전파될 수 있다. 전파될 수 있기 때문에 전파되고 그래서 또 전파되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 - 8강 중)


비유에 능한 리처드 도킨스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들어 생물학적 바이러스의 번식과 생존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에 따르면, 바이러스는 DNA라는 언어로 쓰인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하며, 단순히 ‘나를 복사해서 주위에 퍼뜨리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생존의 기계 장치, 즉 유전자라는 이기적 분자들을 맹목적으로 보존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전달 로봇일 뿐’이고 말이다.


제발, 세상을 향해 시원한 발차기 한번 


‘보이후드’의 엄마처럼 인생이 뭐 이따위인지 나 자신도 화가 나 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 리처드 도킨스의 도발적인 책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만들어진 신’, ‘눈먼 시계공’, ‘이기적 유전자’ 등등 (이 책 원제도 ‘Climbing Mount Improbable(있을 것 같지 않은 산에 오르기)’이다). 그의 책들을 주문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세계가 음모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적어도 이 세상을 향해 시원한 발차기 한방 날려주지 않을까? 믿음의 존재인 ‘신’이 가공의 인물이고, ‘시계공’은 눈멀었고, 나를 구성하는 유전자는 지극히 이기적이라니까, ‘이제 나도 막살아볼 테닷’ 질러대고 싶은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그의 대표작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단 번역이 너무 아쉬웠다. 오래된 판본이라 그런지 문장 자체가 이상한 게 많았다.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논쟁하는 내용이 많았던 것도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진화론 내부에 어떤 이론들이 어떻게 엇갈리고 있는지 기본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읽자니 끝없이 그가 들이대는 증거들이 압박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책을 읽다 말고 검색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럼에도 진화는 흥미로운 것이었고, 삶과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 되어줄 것 같았다.


리처드 도킨슨의 <진화론 강의>는 영국 왕립연구소의 대중 과학 프로그램인 ‘크리스마스의 강연’에서 저자가 강의한 내용을 10강으로 묶어서 96년에 내놓은 진화론 해설서이다. 


일단 이 책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 전에, ‘사실’과 ‘이론’을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 지구 상 생물이 진화해온 단순한 ‘사실’이 있고, 그 사실을 다양하게 증명하면서 진화론적 변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 있다. 진화를 ‘사실’로 확신시킨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다윈 이론의 핵심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다. 그에 따르면 진화는 개체들 간의 다양성을 말하는 ‘변이’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형질의 ‘선택’ 두 가지로 이뤄진다. 따라서 진화는 진보도, 발전도 아니며, 의지를 가진 어떤 방향성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 간단한 메커니즘이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어서, 저자가 그토록 맹렬하게 싸우고 또 싸우는 것이다. 반대파에게도 물론 버티는 이유가 있다. 


실제로 ‘그런’ 것과 ‘그래야 하는’ 것을 혼동하는 우리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이래 인간은, 자연이란 조화롭게 진보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 믿어왔다. 고차원적인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작용하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믿었기에 사람들은 생명현상의 핵심적인 부분이 각 개체가 번식을 위해 벌이는 무의식적인 투쟁에 불과하다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또 다른 진화학자 스티븐 굴드의 말을 빌리면, 진화론을 받아들였을 때 몇 가지 얻는 게 생긴다. 


이처럼 우울한 다윈의 메커니즘을 받아들이면 해묵은 헛된 희망을 버리게 된다. 즉, 현실의 자연이 인간의 우월성을 확인해주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 말이다. 기본적으로 자연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가르쳐줄 수 없다. 가치와 의미에 관한 의문은 다른 분야이다. (칼 짐머의 <진화> 중 스티븐 굴드의 서문 중) 


사실은 그냥 사실이다.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아무리 아름다워도, 혹은 노화와 죽음처럼 종종 불가피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그냥 사실일 뿐인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것과 ‘그래야 하는’ 것을 혼돈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다윈은 사실에 입각한 생명관의 장엄함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자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우리를 해방시켰다. 그 결과 과학 탐구 과정에서 아무리 놀랍고 무서운 사실을 알아낸다 해도 그런 무서운 사실이 우리의 도덕과 의미의 추구를 위협할 수 없고, 도덕과 의미는 우리 자신의 윤리의식에서 나온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갖고 자유로이 탐구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해주었다.


보이후드의 엄마가  “이건 아니야!”를 외쳤을 때 나도 속이 많이 아리고 쓰렸다.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되는 긴 시간 동안 고군분투하면서 기대해온 무언가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엄마는 기대가 저버려졌다는 사실 만을 절망하듯 외칠뿐이다. 진화학자들이 거기에 쐐기를 박는다. 당연히 허망하고 믿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은 사실일 뿐이라고. 뭔가 더 있지 않다고. 기존의 환상에 매여서 원망하지 말라고. 그것은 환상일 뿐이니 두려움 없이 벗어나라고. 그리고 자유롭게 도전하며 살다가 가라고. 


그렇게 해서 아주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살다가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엄한 생명의 흔적이 되는 것이다.


다시뉴스 필진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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