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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7. 2022

[꼭 뭐가 되어야 할까?] #4

누군가의 배우자도 되지 않았고 엄마도 되지 못했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했어.”라고 내가 말하면 왜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냐며, 스스로를 지나치게 비하하는 것 아니냐며, 나무라듯 반문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그러게나 말이다. 지금껏 글을 쓰며 어느 정도 먹고는 살았으니 작가가 되었고, 주말마다 북카페에서 커피를 내린지도 어언 일 년이 다 되어가니 바야흐로 바리스타도 되었는데, 나는 왜 늘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이름이 나지 않아서? 위인전에 이름을 올릴 만한 업적이 없어서? 


아니 사실 그보다,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는 내 말속에는 내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배우자도, 또 누군가의 엄마도 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어쩌다 보니 비혼 중년


그렇다. 나는 비혼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혼인 내 처지를 비하하거나 비관하며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운 좋게도) 오롯이 책임져야 할 가족이 없고, (불운하게도) 여전히 부모 슬하를 벗어나지 못한 중년의 삶이 그리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적이지 않을 뿐 딱히 특별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일반적인 것은 무엇이며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 삶이 대다수의 삶은 아니라는 말로 대신할까 한다. 이 또한 ‘사실’이니까.


어쨌거나 대다수가 아닌 소수의 삶을 사는 나는, 종종 내가 어느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는 경계인 혹은 주변인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선 흉볼 배우자와 그 가족도 없고, 속 썩일 자녀도 없으니 오랜 지기들과도 점점 나눌 이야기가 줄어든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것은 또 아니다. 나에게만 그들의 이야기가 생경한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나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을 것이기에 그저 당연한 일이려니 한다. 사실 꼭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수록 어릴 때처럼 단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미주알고주알 얘기할 수 없는 것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주요 관심사도 조금은 달라진다. 100년 후 200년 후까지 이 세상을 살아갈 내 유전자를 남기지 않은 나는 솔직히 말해 지구의 존립이 그렇게까지 걱정되지는 않는다. 물론 지구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걱정하고, 되도록 환경에 영향을 덜 미칠 수 있는 삶의 방향을 고민해보기는 한다. 하지만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른 지구와 우주의 멀고 먼 미래보다는 지난해 연말 제주 인근 심해에서 일어난 4.9 규모의 지진과 같은 일이 불원 장래에 전국적으로도 일어날까 봐가 더 큰 걱정이다. 그러나 이 또한 인간이라는 족속이 원래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야 뜨거운 줄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선택에 책임을 다하며, 정성껏


비혼의 중년에게는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두 개의 단어가 있다. 바로 ‘자유’와 ‘외로움’이다. 돌봐야 할 식구가 없으니 얼마나 자유로울까? 자유롭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안 하고 싶은 일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비혼에게는 분명 더 많이 허용된다. 그래서 가끔 좋기도 하다. 그러나 자유를 누린 만큼, 딱 그만큼의 대가가 꼭 따라온다. 


그 대가 중 하나가 바로 외로움일 것이다. 내가 돌볼 식구도 없지만 나를 돌봐줄 식구도 없지 않은가! 물론 아직은 연로하실 망정 부모님이 건재하시니 일정 부분 부모님을 의지하고는 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 또한 가능하지 않은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러나 비혼이든 기혼이든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정호승의 시 ‘수선화에게’ 중에서)’라는 시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러니 비혼도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년에 이른 비혼도 괜찮은지 아닌지는 비혼이 아닌 삶을 살아본 바 없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엄마는 한번 되어보는 것이 영영 되지 못하는 것보다는 분명 큰 행운일 것 같다. 하지만 그 행운이 없었다고 해서 인생 전체에 어떤 결여 혹은 결핍이 생겼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분명 위대한 일이지만 누구도 엄마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기에. 


나는 비혼을 적극적으로 선택한 비혼주의자도 아니었고, 비혼 예찬론자도 아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 중년이 된 비혼의 일반적이지 않은 내 삶을 뭐 그리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여기며 지금껏 내가 한 수많은 선택의 결과(로서의 비혼)에 책임을 지며 살아갈 뿐이다. 정성껏!


* 어머니가 필요한 많은 이들의 위대한 어머니였으나 단 한 명의 내 아이를 낳지 못해 늘 외롭고 쓸쓸했던 故 장병혜(1932. 12. 6 ~ 2022. 1. 3) 님의 명복을 빌며, 당신처럼 외로울까 늘 저를 염려하셨던 그분의 영전에 이 글을 바칩니다.


다시뉴스 필진 정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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