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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7. 2022

[공동체라는 이야기] #3

아침을 발견한 아침

새떼가 몇 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번 또 한 번 출렁했다


문태준의 시 <아침>이다. 나무상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키가 작은 나무에 새떼가 앉았다가 다른 나무로 옮겨가면서 나무가 흔들린다. 시인은 이 움직임을 보면서 자신도 흔들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흔들림에 ‘아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의 배경이 된 시간이 아침이겠지만, 그보다도 잠에서 깨는 시간이 아침인 것을 떠올려본다. 이렇게 깨어난 아침은 시인에게 좋은 징조가 되어 어두운 밤과 같은 때에 운명과도 같은 호흡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나는 이것을 아침을 발견한 아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시를 기억하면 함께 떠오르는 추억 하나.


나의 이야기


우리 부모님이 양평 어느 산속에 사실 때 이야기다. 해가 지면 어쩐지 잠을 자야 할 것만 같은 이 고요한 마을에서 나도 부모님과 함께 몇 해를 살았다. 눈이 발목을 덮게 내린 어느 겨울날.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아버지가 함께 가자고 하신다. “눈이 많이 왔더라.” 말씀하시는 아버지 모습을 보니 귀를 덮는 방한모에, 방한화, 물에 젖지 않는 두툼한 바지까지 꺼내 입으셨다. 나는 전날 눈이 많이 내릴 걸 알아 고개 너머에 차를 두고 왔는데, 아버지는 새벽부터 쓸었지만 다 쓸지 못했노라고 눈을 치운 데까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다. “네.” 하고 따라 걸었다. 아버지가 몇 걸음 앞서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내가 밟은 데만 밟고 와.” 


가만 길을 내려다보니 수북이 쌓인 눈길 위로 움푹 팬 발자국이 징검다리처럼 놓이고 있었다. 아버지 뒤에서 몇 걸음 따라가면서 그 볼품없는 뒷모습과 아버지의 걸음마다 놓이는 발자국 징검다리를 번차례로 쳐다보는데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마터면 아버지를 부를 뻔했다.

아버지에게는 저렇게 몇 걸음 앞서가면서 눈길을 헤친 아버지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안 계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없는 길을 닦아주는 그런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늘 부재했다. 그날 나는, 외롭게 눈길을 걸어왔을, 그래서 때때로 아버지의 부재로 발이 시렸을, 누군가의 아들을 보았다. 


나에게 이 발견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 시절이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모든 것을 벽으로 알던 때였기 때문이다. 내가 나고 자란 형편, 내 종교, 내 재능 등 타고난 모든 것이 숨통을 움켜쥐고는 놓아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마다 호흡곤란과도 같은 자기 연민을 앓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아버지-와 같은 모든 것-을 원망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고,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살뿐이고, 두 삶은, 두 삶의 시간은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둘을 분리해야만 견딜 수 있었고, 그래야만 내 삶을 견인해 갈 새로운 힘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날 아침 오래 묵은 의식의 밭이 갈아엎어졌다. 아버지를 ‘누군가의 아들’로 새롭게 발견하면서 아버지와 같은 모든 것들과 화해할 가능성을 발견했고, 무엇보다 자기 연민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나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내게 중요한 이유는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해 줄 부자간의 낭만적인 추억이어서가 아니다. 이미 그때의 감격은 흐릿하다. 내게는 아버지의 시간과 내 시간이 하나의 서사가 된 사건이라는 의미가 소중하다. 이날을 떠올릴수록 그 의미는 더욱 선명해진다. 만약 시간이 연결되어 흐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서사 속에서 시간은 연속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게 도와줄 이야기의 힘 


각자도생의 사회가 되면서 개인의 삶은 개인의 삶 그 너머로 가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눈앞에 보자기만 한 시간'만을 살뿐이다. 완전히 개인적인 삶은 자유가 아니라 소외에 가깝다. 소외된 개인의 삶들이 모인 곳에 공동체의 자리 역시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게 각자도생의 세상에는 개인도 없고, 공동체도 없다. 


우리에게 다시, 이야기가 필요하다. 왜 이야기인가? 이야기는 분절된 두 삶과 두 시간의 차이를 끌어안고 연속성을 부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예전 공동체를 낭만화하거나 거기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해야 하고, 그것은 이야기의 형태로 논의될 때 더 자연스럽다. 공동체라는 이야기는 폭력적이지 않은, 서로에게 정직한 서사여야 한다. 그래서 공동체는 표어나 조문 또는 사업이어서는 안 되고 이야기여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운이 좋게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한다면, 울타리 너머의 다른 삶을 들여다볼 용기, 개인의 삶을 개인이라는 울타리 너머로 보낼 용기가 생길지 모르며, 그러면 삶과 삶을 가로막은 담이 낮아지고 공동체로 가는 길이 닦일지도 모르겠다. 

내 경우에 그 새로운 이야기가 아침을 발견한 아침과 비슷하다.


다시뉴스 필진 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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