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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7. 2022

[평범하고 비범한 사람] #6

청소년 SOS공감행동 비지트 운영자 ‘나의 아저씨’, 강유홍 씨

청소년 SOS공감행동 비지트 운영자 강유홍 씨(57)를 만난 장소는 뜻밖에도 원주의 한 공동주택, 이른바 오피스텔의 관리사무실이었다.


“요샛말로는 본캐라고 한다죠. 공동주택 관리인, 이게 현재 제 본캐라고나 할까요? 그럼 청소년 SOS공감행동 비지트 운영자는 저의 수많은 부캐 중 하나가 되려나? 제가 부캐가 좀 많은 편이에요. 본캐도 워낙 변화무쌍하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청소년 SOS공감행동 비지트는 상근 직원 한 명 없이 운영된다고 했었다. 

강유홍 씨


알음알음 후원하고, 알음알음 찾아오는 청소년들의 비상 아지트 


청소년 SOS공감행동 비지트(이하 비지트).


단체 이름치고는 좀 길고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만 듣고 보면 말 그대로의 의미를 다 담고 있다. 청소년들의 구조 요청에 공감하고 행동하는, 그래서 언제라도 누구라도 그냥 찾아올 수 있는(Visit) ‘비상 아지트’ 혹은 ‘비밀 아지트’라는 뜻이다.


비지트의 전신은 원주 청소년 심야식당 ‘개구리밥차’.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저녁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터미널 주변 공원이나 공설운동장에서 한 끼 식사와 함께 성장 진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청소년 돌봄 프로그램이었고 어느 대기업 사회공헌팀의 후원을 받아 운영했다. 강유홍 씨는 2016년부터 개구리밥차에 합류해 봉사활동을 해왔다. 한때 아이들과 숙식을 함께 하는 대안학교 교사가 본캐였던 그에게 개구리밥차 봉사는 어엿한 본캐의 명맥을 잇는 부캐였던 셈이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저녁이면 청소년 심야식당 '개구리밥차'가 원주에서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을 찾아간다.(사진 ⓒ강유홍)

그러나 2019년을 끝으로 대기업의 후원이 끊기고 개구리밥차는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개구리밥차를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은 청소년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 제한이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 늦은 시간까지 거리를 서성이는 청소년이라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었고,  그중에는 가정 해체, 시설 중도 퇴소 등의 이유로 홀로 사는 아이들이나 가출 팸, 경계성 지능으로 온갖 불이익과 위기 상황에 노출된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미성년의 아이들이 그 시간까지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도 그 아이들의 끼니 걱정을 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아이들 삶의 자리가 허물어졌다는 것이므로 그런 아이들도 눈치 보지 않고 찾아올 수 있는 자리가 되어주자. 이것이 강유홍 씨가 생각한 개구리밥차의 존재 이유였기에 그는 이 아이들과의 인연만큼은 갑자기 끝낼 수 없었다고 한다.


“비영리 민간단체를 만들고, 개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내놓는 봉사활동을 이어 가기로 했죠. 단체나 기업의 후원에 기대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후원금으로 함께 해주는 사람들도 있고, 시간까지 내서 함께 활동해주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게 2020년 2월의 일이니 코로나 19 팬데믹의 서막과 맞물려 이래저래 밥차와는 조금 다른 활동이 된 거예요.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나 할까?”


본업을 따로 둔 운영자들의 순수 봉사로 운영되는 비지트를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어는 ‘알음알음’이다. 알음알음 연결된 후원자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월평균 70만 원 정도의 후원금은 개구리밥차 때의 인연을 매개로 알음알음 찾아오고 연락하는 아이들을 위해 사용된다. 주 사용처는 자녀를 낳아 키우는 청소년 미혼 가정 지원에서부터 병원비 및 경계성 지능 진단비 지원, 소년원 면회 및 영치금 지원 등, 그야말로 위기 상황에 내몰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아이들이 더 나쁜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움을 주는 것이다. 


찬란한 미래에 대한 기대 말고, 일단 살고 보자



“이 아이들이 하게 되는 더 나쁜 선택이란 결국 삶을 스스로 끝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살자! 죽지만 말자!! 이게 제가 이 일을 하는 유일무이한 이유입니다. 이 아이들에게서 드라마틱한 변화나 그로 인한 찬란한 미래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비전을 가지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죠. 일단 살고 보자는 것 이외에는…”


청소년이라고 하면 으레 어른의 보호를 받거나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른들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학교라는 울타리에서도 이탈한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꽤 오랜 시간 대안학교 교사로 지내면서도 미처 몰랐다는 강유홍 씨. 공교육 제도로부터는 이탈했지만 대안학교라는 또 다른 교육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아이들과 함께 한 10여 년의 시간은 어쩌면 낭만에 가까웠던 것이다.


여러 이유로 가정이 해체되어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며, 그 어떤 배움의 기회도 없는 아이들은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다양한 청소년 보호망에서도 소외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이들은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자신에게 경계성 지능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정상적 사고 수준이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하고 그 책임을 오롯이 혼자 지게 되는 식이다.


이런 상황에 놓여 알음알음 비지트를 찾는 위기 청소년들은 분명 우리 가까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우리’로부터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싶은 투명인간으로 취급된다. 그런 아이들에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마지막 하나 남은 삶의 자리, 그래서 본래 비지트의 작명 취지도 영어의 ‘Be’, 독일어의 ‘Sitz(자리, 의자)’를 합성한 ‘Be-Sitz’였다고. 삶의 자리를 찾자, 의자가 되자는 것이었지만 너무 어렵다는 여론에 밀려 요즘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단다.

강유홍 씨가 교사로 근무했던 대안학교. 여러 사정으로 학교 문을 닫을 때 재학생들이 자신의 이름을 그 벽에 써서 남겼다. (사진 ⓒ강유홍)


믿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이 부재했던 시대를 건너온 중년의 자화상 


지금까지 살면서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강유홍 씨는 청소년 시절 어떻게 살 것인가에 천착해 삶의 의미를 찾다가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신학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렇다 하게 목사가 되겠다는 뜻은 없었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모인 신학과 동기와 선배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목사가 되려나 보다 했는데, 때는 바야흐로 1980년대. 이번에는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이런저런 곡절을 겪으며 학업을 제때 마치지 못하는 바람에 목사가 되는 길을 영영 벗어나고 말았다. 하지만 애초에 큰 뜻이 없었기에 큰 아쉬움도 없었다고.

이후 방송작가 보조로 시작해 잡지 기자, 정책연구소 출판 담당, 국회의원 연설 공보 담당을 거쳐 전자상거래 회사 기획 담당, 게임회사 마케팅 담당, 게임회사 중국법인 부대표, 대안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직업군을 두루 거쳐 지금의 그가 되었다. 지금의 그는 본캐로서 공동주택 관리인의 삶을 사는 한편, 부캐로서 비지트 운영자, 이주노동자를 위한 한글교실의 한국어 강사(2021년 6월까지), 국가인권위원회 아동청소년 인권강사 등으로 쉬엄쉬엄 그러나 멈추지 않고 활동한다.


“어떤 이는 저에게 만날 때마다 직업이 바뀌는 사람이라며 한 사람이 일생동안 과연 몇 가지 직업을 가져볼 수 있는지 실험하는 중이냐고 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그냥 되는대로 닥치는 대로 살았던 것 같아요. 나름 진지한 고민도 꽤 많았는데 어린 시절엔 그 고민을 마땅히 털어놓을 곳도 없었고, 그런 얘기에 귀 기울여줄 어른도 없었죠. 그런 고민은 배부르고 걱정 없이 살만 하니까 하는 ‘쓸데없는 짓거리’라며 등짝이나 후둘겨 맞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죽 혼자 여기저기 부딪히며 깨지며 살 밖에… 제 또래라면 대부분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도 그럭저럭 여기까지 온 건 어쩌면 운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모두들 얼마나 열심히 사는데, 전 운이 좋았던 거죠.

얼마 전에 가수 아이유가 TV에 나와서 이 비슷한 얘길 하더라고요. 다들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데 자기 좋아하는 일 하면서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며, 운이 좋았다고. 운이 좋기로는 저도 아이유 못지않구나 싶습니다. “


‘되는대로’, ‘닥치는 대로’, ‘그러나 운 좋게도’라고 말했지만 믿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없었던 그 시절의 그는 혼자서 꽤나 치열하고 진지했을 게 분명하다. 그리하여 그 막막했던 기억과 경험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른이 된 지금의 그는 하필 우리 곁에 처절하게 ‘혼자’인 채로 투명하게 존재하는 아이들에게 주목하게 되었을 터다. 그래서 그는 이 아이들이 이 위기의 시간에서 더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고 성장의 과정을 잘 견디어 나갔으면, 그렇게라도 살아남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잠시나마 기대어 쉴 수 있는 의자 같은 어른이 되어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설령 도무지 낙관할 수 없는, 별다른 비전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사람이라서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고 실수도 한다. 그러나 그 잘못된 선택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온전히 수용해줄 무엇이 있을 때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가정이 그 역할을 최우선적으로 하는 곳이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에게는 가정이 이미 해체되었거나 있더라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때는 사회가 그 역할을 좀  대신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적 이웃에게 눈 돌릴 수 있는 아량을 지닌 ‘나의 아저씨’가 되어 가는 중 


“요즘 우리 사회의 청소년과 청년들은 시험과 직업이, 중장년층은 집과 자동차와 자녀교육이, 그리고 노년층은 연금과 병원과 요양원이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성적과 상관없으면 안 하고, 돈벌이 아니면 할 필요 없고, 몸에 좋은 거 아니면 손도 안 대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렸죠. 우리 삶이 어떤 시스템에 의해 저당 잡히거나 포위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회사 들어가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아서 좋은 유치원에 보내고, 그 아이가 또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그러다가 결국 좋은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좋은 요양원에 들어가 생을 마치고 좋은 납골당에 안치되는 것이 마치 성공한 인생인 양 조장하는 시절이 되어버린 거죠."


그러나 그럴수록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기 가족에게만 충실한 어른이 아니라 완전한 타인, 그중에서도 사회적 이웃과도 서슴없이 나눌 수 있는 아량을 가진 어른이 더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머쓱한 미소를 짓는 강유홍 씨. 인터뷰 기사인 줄은 알지만 얼굴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해도 된다며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서 불현듯 한때 전 국민의 눈물 버튼이었던 TV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떠올린 건, 그가 하필 가수 아이유의 얘길 해서였을까?


믿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이 부재했던 시대를 혼자 건너온 중년이 이제 스스로 그런 어른이 되어가려는 지금의 모습이 바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나의 아저씨’를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오면 그는 원주 소재 한 대학교 대학원 다문화학과 학생이라는 또 하나의 부캐를 갖게 된다. 오십 넘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공부’라는 생각에 일터와 가까워서 심지어 국립이라 등록금이 덜 비싸서 선택했다는 그의 부캐가 몇 년 후 네팔 안나푸르나 좀솜 쯤의 한글교실에서 새로운 본캐로 발현될지 두고 볼 일이다.


* 청소년 SOS공감행동 비지트에 알음알음 후원을 원하시는 분은 인터넷신문 다시 편집부(again@daasi.news) 혹은 다시 배움 교육원(02-332-2692)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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