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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7. 2022

[꼭 뭐가 되어야 할까?] #5

새해 유감(有感) : 애 자란 게 어른

어느새 해가 바뀌고 한 달도 더 지났다. 심지어 설 명절까지 지냈으니 이젠 정말 어쩔 수 없이 한 살 더 보태진 내 나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익숙하게 여길 만한 때다. 그런데 나는 아직 내 나이가 실감 나지 않는다. 내 나이를 가리키는 ‘51’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비현실적이어서 나와는 무관한 ‘아라비아 숫자’로만 느껴질 뿐이다. 어쩌면 내년 이맘때까지 나는 죽 이러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 나이를 운운하며 생일이 지날 때까지 한번 더 유예해볼까? 잠시 얕은수를 떠올려 보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어 그만두었다. 사실 내가 그 얕은수를 부리든 말든 아무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나는 이 일이 왜 아직도 이토록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내 나이가 어색하다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밝히는 일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 나이를 말하고 나면 나 혼자 지레 화들짝 놀라곤 했다. ‘대체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린 거야!’ 하는 소녀적 낭만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과연 내 나이에 맞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 나이만큼 정말 어른인 것일까?


요컨대 내 나이가 나를 부끄럽고 놀라게 만드는 이유는 내가 아는 나의 여전한 ‘철딱서니 없음’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내 나이가 영 어색하기만 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어린 시절 나는 어른에 대한 참으로 밑도 끝도 없는 환상을 가졌다. 어른이 되면 뭐든 다 알게 될 것이며 그래서 모든 게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 믿음이 사실이라면 모든 것을 다 아는 어른은 옳고 그름,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쯤은 척척 구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어른이라면 당연히 옳은 일과 해야 할 일은 행하고, 그른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은 절대 하지 않는 훌륭한 사람들이어야만 했다.


나는 언제쯤 이 환상에서 깨어났을까? 환상을 깨트려준 특별한 사건이 없었던지 정확한 시점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른에 대한 그 무조건적인 믿음이 환상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달을 이후로도 나는 꽤 오랫동안 내 기대를 저버리는 ‘이상한 어른’을 보면 ‘어른이라면서 왜 저럴까?’ 하며 의아하게 여겼던 기억은 있다.

그 시절 내 눈에 비친 ‘이상한 어른’이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어른들이었다. 사정이 급할 땐 눈치껏 무단횡단도 하고 신호 위반도 하는, 일상다반사까지는 아니지만 살면서 한두 번 길에서 마주친 행인과 괜한 시비가 붙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공공장소에서 떼를 쓰는 아이를 힘으로 제압해 마침내 아이가 더 큰 소리로 울게 만드는, 흘렸는지 버렸는지 조금 애매하긴 해도 휴지를 길에 버리고 모르는 척 지나가는 그런 어른들 말이다. 


애 자란 게 어른이라고요? 무슨 그런 뻔한 말씀을!


“어른이 뭐 저래?”
“어른인데 왜 그래?”


이 안타깝고 순진무구한 질문에 내 부모는 그 어른이 나쁜 어른이라 그렇다며, 너는 이다음에 절대 그런 어른이 되지 말라는 매우 교과서적인 교훈을 남기셨다. 하지만 충분히 알 법도 한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어른도 그럴 수 있다는 이해가 싹트지 않는 내가 몹시 답답하셨던 모양이다.


어느 날 엄마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어른이 뭐 별거인 줄 알아? 애 자란 게 어른이야!”

그러나, 애 자란 게 어른이라는 걸 내가 몰라서 물은 게 아니지 않은가! 송아지가 자라 소가 되고 강아지가 자라 개가 되듯 애가 자라 어른이 되는 거야 말해 뭐하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어른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이지 않은가!


나는 엄마의 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어른들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이해(물론 그게 모두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은 아닐지라도) 대신 ‘어른이라도 별수 없기도 하다’는 체념을 가슴 깊숙이 꽂은 채 나도 아주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갔다. 그리고 어느덧 그 체념이 이해와 같은 것이라고 믿으며 ‘이상한 어른’을 보고도 더는 놀라지도 않고 의문을 갖지도 않게 되었다. 세상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이상한 어른’이 있었고, 그로 인해 나의 감각도 다소 무뎌졌으므로. 


공자의 미션은 임파서블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어른에 대한 그 밑도 끝도 없는 환상을 완전히 파기하지 못하고 지금껏 어딘가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소중한 환상에 이미 어른이 된 나를 자꾸 이리저리 비추어 가며 환상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나의 면면을 그리고 어린 시절과 큰 변화도 없는 나의 현재를 몹시도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환상에 비추어 보건대 나는 언제나 내 나이에 맞는 모습이 아니었고, 내 나이만큼 어른스럽지도 않았다. 마흔이 넘도록 불혹(不惑)은커녕 바람도 불기 전에 먼저 팔랑거리는 내 마음을, 오십이 되었건만 천명(天命)은 고사하고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내 마음조차 모르겠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 나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이 판국에 40이니 50이니 하는 숫자가 나와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그래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던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숫자에 불과한 나이에 일찍이 공자(孔子)가 굳이 불혹이니 지천명(知天命)이니 하는 특별한 미션을 부여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혹시 마흔이 되어도 유혹에 휘둘리는 것은 여전할 것이며, 쉰이 넘어도 하늘의 뜻은 알기 어렵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결국 공자의 미션은 예나 지금이나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란 말인가?


문득 애 자란 게 어른이라던 그 시절 엄마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애 자란 게 어른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어른이 된다고 해서 아이 때의 생각과 마음이 다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어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일시에 똑같이 철이 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어른이 되었다고 아이 때와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또 어른은 아이와 비교해 뭐 그리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그냥 나이 든 아이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오십이 넘으니 비로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은 가늠이 되는 말이 하나 더 늘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하늘의 뜻도 조금은 짐작하게 되는 날이 올 것 같기도 하다. 


다시뉴스 필진 정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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