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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7. 2022

[공동체라는 이야기] #4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상상한다는 것은 한계를 아는 일과 다르지 않다.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할 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어정쩡한 상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계를 모르는 무한한 상상은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실속 없는 공상으로 끝나버린다.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는 일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경험과 지식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에 대한 모든 기억을 끌어모으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충분히 기억하고 난 뒤에야 새로운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기억해야 할 더 많은 것이 있겠지만, 내 경험을 끌어모아 세 개의 세상을 추려본다.


하면 된다의 세상


이 세상의 가치를 대변하는 구호는 "하면 된다"이며, 최고로 치는 덕목은 부지런함이다. 동사무소에서 트는 새마을 노래로 아침을 열고, 사당오락이니, 일찍 일어나는 새 어쩌고 하는 말을 어느 곳에서나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해내지 못한 것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해내지 못한 사람들은 '왜 해내지 못했는가?' 뿐만 아니라 '왜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

"하면 된다"의 장점은 패배 의식의 극복에 있다. 주위에 절망뿐이어서 마음이 몸을 주저앉히려 할 때, 행동이라는 몸의 방식으로 마음을 끌고 간다. 그런 원리로 소망 없는 마음의 더께, 패배 의식을 딛고 몸이 주인이 된다. 이렇게 행동하는 몸이 성취를 경험하면서 사회적 성취로도 이어져 수많은 성공 신화가 탄생했다. 반면에 몸에 패한 마음은 더욱 쪼그라들고, 몸의 승리를 위한 모든 방식이 정당화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이 행동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는데, 이런 분위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속박이 된다.


되면 한다의 세상


그다음 출현한 세상이 "되면 한다"의 세상이다. 이 세상은 "하면 된다"의 세상에서 패배자이거나 이방인일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세상이다. 이전 세상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모든 것들을 비틀어 게으름을 예찬한다거나, 멍을 때린다든지 하는 등의 복수를 한다. 하지만 알짬은 저마다 자신만의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느리게’, ‘힐링’, ‘워라벨’, ‘취존’과 같은 단어들과 ‘정답은 없다’, ‘다른 것은 틀린 게 아니다’ 같은 말을 어느 곳에서나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도 "하면 된다"의 세상에 있기 때문이므로, 행복을 위해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되면 한다"의 장점은 다양성의 획득에 있다. 이 길만이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면 된다"의 세상에서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행동주의의 강박에서 벗어나면서 자신만의 방식과 속도로 여러 빛깔로 꿈꾸는 인생을 그리게 되었다. 반면에 삶의 결과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선 것이 개인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으므로 반드시 행복해야 하고, 남들에게도 행복해 보여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이처럼 결과와 행복의 이중 압박을 받기도 한다. 무언가 해내지도 못하고, 행복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사람들의 서글픈 미소.


해야 한다의 세상


"하면 된다"의 세상이나 "되면 한다"의 세상이 엄연히 다르지만, 달리 보면 엇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두 세상 모두 그 중심에 "된다", 곧 '성취'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에는 모두가 성취할 수 있다는 허위의식이 있고, 후자에는 나는 성취할 것이라는 착각이 있다는 것이 차이랄까. 어떤 세상에나 이루는 사람이 있으면,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느 쪽을 택했든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위축되고 만다. 두 세상 모두 성취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하면 된다"와 "되면 한다"를 차례로 경험하면서 두 세상 어디에도 내가 정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실망했다. 아니 그보다는 내 무능함이 불러온 죄책감을 얻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몸이 무겁고, 마음이 내 편이 아닐 때, 근사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칼 노락과 루이 조스가 지은 그림책 <키아바의 미소>. 이누이트(에스키모 인) 소년 키아바는 아빠랑 낚시하러 갔다가 난생처음 커다란 물고기를 낚는다. 그런데 곧 잡아 먹힐 이 물고기가 키아바를 보며 다정한 미소를 짓자 고민에 빠진다. 결국 "나는 미소 짓는 물고기는 절대 먹을 수가 없어!"라고 소리치며 다시 놔주고 만다.

아빠랑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곰을 만나게 된다. 아빠가 겁을 주어 곰을 쫓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곰이 점점 더 사납게 으르렁거릴 때, 좋은 생각이 떠오른 키아바는 곰에게 다가가 미소를 짓는다. 곰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어디론가 가버린다. 아빠는 "훌륭한 마법사"라고 키아바를 추켜세운다. 

다음날 먼 곳에서 온 사냥꾼들이 어마어마하게 큰 폭풍이 오고 있다는 나쁜 소식을 전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폭풍 대비로 분주할 때, 딴생각을 품은 키아바는 마을을 떠나 폭풍을 만나러 간다. 키아바는 무서웠지만 '두 발로 버티고 서서' 폭풍에게 미소를 짓는다. 미소 짓는 키아바를 향해 "너 같은 어린애의 미소가 나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고함을 친다. 키아바의 멋진 대답! "안 된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아요. 그래도 노력은 해 볼 수 있잖아요?" 어린애의 대담한 그 말에, 폭풍은 어이가 없어서 격렬하게 웃는다. 바람을 불게 하는 걸 잊은 채. 


이렇게 키아바는 마을을 구한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는 키아바와 그의 말을 사랑하게 되었다. 해야 할 일을 알고,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가짜 질문일 뿐이다. 가짜 질문의 위력이 폭풍처럼 거셀지라도 되고 안 되고는 “해야 한다”의 세상의 말이 아니다. 어떤 성취에 이른 사람은 박수받아 마땅하지만, 성취를 비껴가는 실천의 이유가 분명한 곳에서만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새로운 공동체는 가짜 질문을 무력하게 하는 사람들이 두 발로 버티고 선 곳에서 일어나는 성취다.


다시뉴스 필진 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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