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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7. 2022

[크크의 다시 읽기] #7

잊힌 지식인의 초상

“요즘 ‘지식인’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거 같아.”

“그러게, 잘 안 쓰지?”


부부의 대화에 20대 아들이 끼어들었다. 


“많이 쓰잖아. 네이버에 그거, 지식인, 몰라?”


훅 들어온 아들의 참견에 세대차이도 느꼈지만 ‘지식인’이라는 단어가 내가 젊었던 시절의 그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음을 실감했다.


30여 년 전 지식인은 시대의 사표(師表)이자, 흠모의 대상이었다. 학문의 전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대학(그런 시절이 있었다)에 입학하면 우리는 누구나 지식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선망과 책임의식을 동시에 배웠다. 그 시절 대학생들은 정작 지식을 습득하고 공부하는 데는 매우 소홀했는데도 말이다. 빠른 시대의 변화 속에서 이제 지식은 누구나 습득 가능한 것이 되었고, 지식도 지식인도 뜻하는 바가 사뭇 달라졌으니 누가 지식인을 자처하고 누구를 지식인으로 지칭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지식인의 표상으로 오롯이 남아 있는 한 분이 있다. 신영복 선생이다. 


대학시절 나는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한 야심만만한 청년도 아니었고, 자유를 만끽하는 청춘도 아니었으며 졸업까지 많은 것들이 익숙해지지 않는 경계인처럼 지냈다. 그 시절에 만난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오랫동안 인상적이었다. 당시는 사회의 변혁에 불을 지피는 뜨거운 책들이 많았다. 이 책은 감옥이라는 엄중한 공간에서도 따뜻한 시선을 갖고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그 단단한 내면에 절로 품격이 다른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후로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러다 선생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2013년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으로 투병하다 2015년 극심한 고통 끝에 열흘간의 단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 과연 신영복 선생답게 돌아가셨구나.


그는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숙명여대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복역한 지 20년 20일 만인 1988년 8월 15일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한 후 1989년부터 2014년까지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출소에 맞춰 나온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부터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강의’ 등 많은 책이 사랑받았고, 그의 유려한 붓글씨 필체를 소주병부터 생활용품까지 다양한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책 ‘담론’은 선생이 성공회대에서 가르친 ‘인문학 특강’의 2014년 마지막 강의를 정리한 내용이다. 총 25강을 2부로 나누어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2부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선생의 말투가 느껴지는 구어체 덕분에 나는 창밖으로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날의 강의실로 위치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생이 인생을 통해 담금질한 철학이 마침내 자기 완결형이 되었고 선생 자신이 본인이 연구하고 따랐던 성현들을 재현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공자의 가르침을 정리한 논어처럼 이 책도 강의록 아닌가. 


선생은 동양고전이 갖고 있는 풍부한 사상들을 유연한 세계 인식의 도구로 활용할 것을 추천하고 있지만 그 방법은 현란한 논리적 전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수시로 접하는 갈등과 고민을 공감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니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쏙쏙 박힌다. 


"우리들의 연상 세계도 그렇습니다만 나는 ‘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겪은 일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난 사람과 겪은 일들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나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일들로부터 격리된 나만의 정체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관계다’를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독방은 내게 최고의 철학 교실이었습니다. 


연상 세계에 사람을 심으려던 나의 노력은 결국 나에게 작은 위로와 작지 않은 고민을 안겨주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친구들의 얼굴은 그와의 개인적인 우정에도 불구하고, 또 개인적인 우정 때문에 우리 시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데 장애가 되었습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누구의 친구이고 누구의 가족일 터이지만 그것이 위의 사고 속에 계속 친구나 가족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의 사고가 주관적 감상에 기울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은 어차피 절친한 친구들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독방의 고독한 공간에서 뜨겁게 해후한 나의 친구들을 소중히 간직할 것입니다." (24강 사람의 얼굴 중에서)


그의 관계론은 이렇듯 따뜻하다.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 삶과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쉽게 이해가 되고 당장 써먹어지는 생각이다. 선생은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바르게 생각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절제하고 성찰하며 살았으며 끝내 시대를 대변하는 완벽한 지식인으로 남았다. 


이십 대 초반 나는 선생의 명료하게 정리된 정신세계와 강인한 내면을 흠모했다. 책장을 넘기며 선생은 죽음을 앞두고 더욱 담대해졌고, 시적인 감수성을 담을 만큼 의연해졌음을 확인했다. 나 또한 나이 들어 선생의 가르침이 인생사 어디쯤에 해당하는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에 씁쓸함인지, 쓸쓸함인지, 어떤 알 수 없는 느낌이 남았다. 빛바랜 느낌이랄까? 오래되고 한결같은 것들이 늘 귀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왔는데, 그저 오래되었을 뿐이라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동양적인 관계론에서 말하는 조화로움을 잊은 채 긴 시간 경쟁과 생존을 전부로 알고 살아왔다. 신영복 선생의 책을 다시 한번 정독한 지금도 나는 그러한 내 인식을 돌이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 시절의 나와 그 시절에 흠모했던 사람으로부터 내가 너무 멀어졌나 보다. 선생은 말씀하셨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라고. 나는 스무 살 시절과 많이 다르게 살아왔고, 그것은 이제 나의 생각이 되었다. 시대를 읽고 정리하며 옳고 그름을 알려주던 지식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하나 둘 사라져 가는 지금, 나는 새로운 지식인을 기대하는 마음 없이 살던 대로 그냥 살아가게 될 것만 같다. 

다시뉴스 필진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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