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 뉴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Mar 15. 2022

[공동체라는 이야기] #5

하루 한 번 신호 앞에서

농구를 사랑하지 않아


대학교 때 농구를 많이 했다. 아니 거의 농구만 했다. 신입생 때, 선배들과 낮에 실컷 농구를 하고, 저녁에 술을 마시러 갔다. 자정이 넘도록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킨 착실한 후배 중 한 명이었다. 한 선배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요즘 애들은 농구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 않았고, 또 동아리를 아끼는 선배의 말이어서 그 자리에서는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강의 빼먹고 낮에는 내내 함께 농구를 하고, 늦은 밤까지 농구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농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니, 뭘 어떻게 더 해야 농구를 사랑하는 것인지 고민했다. 나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이고, 그저 어디서나 선배에게 자주 듣는 평범한 이야기일 뿐인데, "우리 공동체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 기억이 소환된다. 상한선이다. 이런 질문에는 늘 이상(理想)과도 같은 상한선이 있고, 질문하는 사람은 상한선에 대한 상대의 의지를 확인하려 한다. 말해도 믿지 않을 거면서 꼭 그런다.


아들 넷 아빠입니다


아들 넷을 키운다.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에게 아이들은 어떤 의미인가?”, “부모로서 어떤 특별한 마음가짐이 있나?” 묻는다면, 결론은 부모로서 ‘특별한 사명감 같은 것은 없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결혼 전부터 남들보다 유별나게 애들을 좋아한 것도 아니고, 부모라는 말에 가슴에서 뜨거운 뭔가가 올라온 적도 없거니와, 남과 비교해서 자식을 특별히 사랑한다고 느낀 적도 또 그래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친 적도 없다. 한창 육아할 때는 다른 부모들처럼 아이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가 가장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네 명이 한꺼번에 학교 버스를 타고 집에서 멀어질 때 가장 큰 행복을 경험한다. “방학이란 무엇인가?” 겨우내 생각했다. 

자식만 많은 게 아니고, 나는 하는 일도 많은 이를테면, N잡러이다. 친구가 ‘본캐’가 뭐냐고 물은 적이 있어서 고민을 좀 해봤는데, 돌고 돌아 끝내 결론은 '아들 넷 아빠'다. 그러니까 부모로서 어떤 특별한 사명감은 없지만, 내 주된 정체성의 중심에 아이들이 있다는 말이다. 부모라는 이 정체성에는 어떤 강박 같은 것이 있다. 어쩌다 식당에 애들 둘(셋)만 데리고 갔는데, 누군가 "아들만 둘(셋)이신가 봐요?" 물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아뇨. 넷이에요. 아들만 넷!" 아들 '넷' 아빠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억울하다. 애들 반응도 나와 비슷하다. 어쨌든 이제 나에게 상한선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내가 자주 되새기는 말은 상한선에 한참 못 미치는 말이다. "미안해하지 말자"


하루에 한 번 신호 앞에서


돌아가신 황현산 선생님이 어느 문학 팟캐스트에 출연해서 한 이야기다. 중국집 배달원이 방송 인터뷰에서 "하루에 한 번은 꼭 신호를 지켜요."라고 말한 것을 듣고 인상에 깊게 남았다는 말이었다. 하한선이다. '적어도 이것만은 지키자', '어떤 상황이라도 최소한 이것만은 하지 말자.' 나는 이런 이상(理想)의 하한선 혹은 하한선의 의지가 사람과 공동체를 지탱한다고 믿는다. 어떤 면에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상한선이 아니라 하한선만으로 충분하다. 

상한선의 이상 추구에 실패한 사람과 공동체의 추락에 하한선이 없다는 것이 상한선의 비애다. 적어도 하한선의 추락은 이보다 안전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상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아니라 마지노선이 무너질 때, 사람과 공동체는 절망한다. 배달원의 인터뷰를 다시 생각한다. 새로운 공동체는 저마다의 이상이 만나는 곳이 아니라 하루 한 번 신호 앞에 서는 사람들의 의지가 모인 곳에서 시작한다.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다시뉴스 필진 한정훈
매거진의 이전글 [고구마 세 개]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