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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pr 19. 2022

[공동체라는 이야기] #6

좋은 주제를 찾아서

여섯 번째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동안에 쓴 글들을 가볍게 정리해보려고 한다. 처음 글(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이유)은 전체 시리즈를 여는 이야기였고, 두 번째 글(누구나 누군가가 필요하다)과 세 번째 글(아침을 발견한 아침)은 사람과 사람, 삶과 삶의 실재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네 번째 글(두 발로 버티고 서서)과 다섯 번째 글(하루 한 번 신호 앞에서)은 공동체의 '주제'에 관한 것이었다. 


공동체의 ‘주제’는 공동체가 드러내서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고, 공동체의 중심에 존재하면서 공동체 안의 사람과 사람, 삶과 삶을 연결하고 아우르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주제'라는 것은 교육사상가 파커 파머가 제안한 '진리의 커뮤니티' 모델에 사용된 '위대한 사물'이라는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주제'는 '위대한 사물'과 동의어이며, 커뮤니티의 중심에 있다. 


"위대한 사물(주제)은 교육 커뮤니티의 핵심적인 연결축이다. 가령 원시인이 불 주위에 몰려들어 그것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사물 주위에 모여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인식하는 자, 가르치는 자, 배우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개념을 일반적인 공동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교실은 교사 중심이어야 할까, 아니면 학생 중심이어야 할까? 여러 사람 앞에서 이 질문을 해보면 답은 반반 정도, 빈도가 엇비슷하다. 교사라고 대답하는 사람과 학생이라고 대답하는 사람 모두 자신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파커 파머는 교실의 중심은 교사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주제'여야 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에 동의하고, 결론적으로 '공동체는 주제 중심이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교사 중심’과 ‘학생 중심’을 하나의 은유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객관론 신화: 일방통행


‘교사 중심’의 교실이라는 말은 우선적으로 지식의 양과 권력의 관계 따위를 떠올리게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지식은 순수하게 '객관적'이라는 신념을 포함하고 있다. 교사 중심이라는 말의 역사가 탄생한 곳에서는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에 개인의 주관이 들어가지 않아야 하고, 객관적 사실 그대로 보존되어 전달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파커 파머는 이것을 '인식의 객관론 신화'라 부른다.



객관론 신화의 한계는 대상에 관한 객관적 지식을 잘 아는 전문가와 그렇지 못한 아마추어가 나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인식의 대상에 관한 지식은 순수하고 객관적이므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전문가에서 아마추어에게로 흘러야 한다. 얕은 지식은 편견과 오류가 많으므로 아마추어가 인식을 드러내는 행위는 객관론 신화의 세상에서 역류이며 혼란일 뿐이다. 따라서 위계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위에서 아래로 일방통행한다는 특징이 있고, 이것은 교사 중심 혹은 인식의 객관론 신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판타지 세계: 자기 중심성


‘학생 중심’의 교실을 상상하면 우선 혼란이라는 단어나 어수선한 분위기가 떠오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인식의 객관론 신화가 주류가 되기 전에, 감정, 직관, 신앙에 의존해 대상을 인식하는 (고대) 세계와 만나게 된다. 교사 중심이 지식의 객관성을 신화화했다면, 학생 중심은 객관 이전의 주관의 세계, 곧 판타지의 세계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고, 바위와 나무에도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믿고, 일상의 모든 사건이 상징과 표징으로 가득 찬 세계가 판타지의 세계다.



판타지라는 장르는 현대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지만, 사실 그 세계는 현실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사실적 관찰이나 논리적 분석을 통해 감정, 직관, 신앙이라는 판타지의 재료가 미신, 조잡한 인격화, 광기에 가까운 편견 등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하지만 판타지의 세계는 주관이 이룩한 작은 세상 안에서의 내적 통일성만으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세계의 바깥에 자신을 설득할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 자기 중심성이고, 그것이 판타지 세계의 한계이기도 하다.


주제 중심 공동체


그런데 객관론 신화와 판타지의 세계는 공존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전혀 다른 길로 보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첫째, 둘 다 소통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길이 닫혀 있고, 후자는 세계 바깥에서 안으로 통하는 길이 닫혀 있다. 둘째, 권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교사 중심은 궁극적 권위가 전문가에게 집중되는 문제가 있고, 학생 중심은 궁극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또는 권위 자체가 부재한 상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대안적 권위를 다시 합의해야만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제까지 내가 한 부정적인 공동체 경험의 대부분은 이 둘의 조합, 즉 사람과의 소통의 문제 혹은 소통하는 사람의 문제에서 비롯한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교사 중심이나 학생 중심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지향 자체가 가진 한계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 부정적인 공동체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반적인 공동체의 관점으로 생각하면, 교사 중심은 대표 중심, 설립자 중심, 경력자 중심으로 볼 수 있고, 학생 중심은 자기중심적인 공동체나 혹은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의 공동체로 볼 수 있다.

“표 4-2 진리의 커뮤니티”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한문화, 2008, 194쪽)


교사 중심과 학생 중심 커뮤니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파커 파머가 제안한 주제 중심의 '진리의 커뮤니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설명하는 가르침에 대한 정의, 곧 "가르침은 진리의 커뮤니티가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문장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커뮤니티' 모델의 존재론과 인식론의 핵심인 "리얼리티는 관계의 연결망이며, 우리는 그 속에서 일체감을 획득할 때 리얼리티를 인식하게 된다"라는 문장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 '진리의 커뮤니티' 모델을 가시화한 도표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의 중심에 주제가 있고, 인식자는 주제를 비롯한 다른 모든 인식자와 연결되어 있다. 이 모델 안에서는 전문가와 아마추어가 나뉘지 않고 평등하며, 각자가 관계 맺은 만큼 아는 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인식자는 자기의 관계를 절대화하지도, 또 서로의 관계를 상대화하지도 않는다. 주제가 중심에 있는 ‘서클’의 이미지와 공동체 이야기를 연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제까지 경험한 공동체의 중심에는 대부분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는 그 중심에 주제가 있어야 한다. 좋은 대표, 좋은 설립자, 좋은 경력자가 있는 공동체는 드물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보편적 모델로 삼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성찰하고 외부와 소통하는 공동체, 구성원이 전부 이타적인 공동체는 그런 개인이 세상에 드문 것 이상으로 찾기 힘들다. 간단히 말해,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좋은 사람이 없어서? 아니다! 좋은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좋은 관계는 좋은 주제에 연결된 사람들의 관계망 안에서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새로운 공동체의 중심에는 사람이 아니라 주제가 있고, 좋은 주제는 세상에 가득하다.


다시뉴스 필진 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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