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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pr 25. 2022

[다시 배움의 책 읽기] #1

중년의 뇌

이불로 만리장성을 쌓은 속사정


50세를 기점으로 갑자기 어깨와 등의 통증이 심해졌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운동을 해도 마사지를 받아도 소용이 없었다. 남편이 그렇다고 투덜댈 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내 일이 되고 보니 안 되겠다 싶었다. 우리는 일단 오래 쓴 침대를 바꿔보기로 했다. 서로 원하는 매트리스의 단단함이 달라 이 김에 아예 싱글 두 개를 사서 붙여쓰기로 했다. 잠귀가 더 엷아져서 안 그래도 남편이 옆에서 뒤척이면 자꾸 깨던 차였다. 덩달아 시트와 이불까지 전부 바꿔야 했지만 부부가 침대 양 끝을 향해 모로 누워 이불을 가랑이에 끼고 돌돌 말아 자는 바람에 늘 어느 한쪽이 자다 추워서 깨던 터라 그것도 잘 되었다 싶었다. 


“이쪽은 요거밖에 안 남아!” 

“그쪽에서 너무 많이 당기고 있잖아!”


밤마다 펼쳐지던 이불 전쟁이 금방 옛말이 되었다. 싱글 이불 두 채가 우리의 영원한 휴전을 보장하면서 느긋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런데 금방 이른 추위가 몰려왔다. 홑이불만 덮고 자다 깜짝 놀란 우리는 만사 제치고 겨울 이불을 다시 사야 했다. 쓰던 전기장판도 꺼냈는데 옛날 침대용이라서 싱글 두 개를 다 덮도록 가로로 깔았다. 그랬더니 머리와 다리는 장판 밖으로 나가고, 침대 양끝은 한 뼘씩 모자랐다. 온도 조절기도 머리맡에 오지 못한 채 남편 매트리스 옆면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래도 여전히 화력은 좋았다. 금방 뜨거워진 이불속으로 쏙 들어온 남편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원래 이렇게 뜨거웠나? 혹시 망가진 건가?”

나도 똑같이 의아했지만 무심히 그냥 그런가 보다 하던 중이었다. 남편이 온도 조절기를 들어 어둠 속에서 더듬거렸다. 주황색 불이 희미하게 들어오는 온도판을 보면서 다시 물었다. 

"이거 위로 올리는 게 온도 높이는 거야, 아니면 반대야?" 

"전원 버튼이 있는 쪽으로 내리는 게 최저 온도 아니겠어? 그래야 사람들이 자다가도 껐다 올렸다 할 테지."


내 말에는 논리가 전혀 없었다. 남편도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달리 어쩌지 않고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우리는 아랫목에 몸 지지듯 땀까지 흠뻑 흘리면서 새로 산 겨울 이불을 사방팔방 걷어차고 잤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원래 그렇게 등은 따뜻하고 몸은 시원하게 자는 게 좋은 거'라고 소감을 밝혔고 나도 '그 말이 맞다'라고 맞장구쳤다.


그렇게 우리는 별생각 없이 10여 일을 더 지냈다. 자다 깨 보면, 나는 침대에서 가장 시원한 모서리로 굴러가 한쪽 발은 침대 아래로 늘어뜨리고 맨몸으로 자고 있었고, 이불은 등 뒤로 몰아서 델 듯이 뜨거운 침대 한복판으로 만리장성을 우뚝 세웠다. 남편은 온도 조절기가 자신의 침대 쪽에 있으니 껐다 켰다를 책임지고 반복하느라고 내내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상황에 순응했고, 깨고 나면 잊었고, 잠들 때면 또 잠깐 의아하다가 한결같이 그러려니 하고 잠들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온도를 내내 최고 온도로 맞춰놓고 잤다는 것을. 헉, 70도! 

물론 모든 건 우리의 불쌍한 두 눈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전기장판을 깔았던 첫날, 남편이 온도 조절기를 확인하면서 온도를 높이는 것이 이쪽이냐 아니면 저쪽이냐고 물었을 때 안타깝게도 우리는 둘 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도 조절판의 숫자들이 안 보였고, 맨 위에 '고온'이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안 보였다. 어두워서가 아니라 노안 때문이었다. 기억력도 흐릿해지니 작년에는 어떻게 온도 조절을 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머리에서 인출되지 않아 그에 의지할 수도 없었다. 


남편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 답을 얻는데 익숙한 사람이다. 대답이 신통치 않다고 몸소 나서서 확인하는 적극성은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의문을 내려놓는 사람은 아니다. 평소 우리 같았으면 남편은 자신이 이해될 때까지 계속 의구심을 품고 중얼댔을 것이고, 행동파인 내가 곧바로 일어나 불을 켜고 돋보기를 찾아 온도 조절판을 내 눈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남편이 의문을 일찍 잠재웠고 나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왜 이러지?


물론 소소한 이유는 찾자면 많다. 쓰는 데 익숙하지 않은 내 돋보기가 그나마 어디에 있는지 몰라 선뜻 움직여지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있다. 남편은 아무 데나 물건을 두기 때문에 자기 돋보기를 엉뚱한 데 두고 찾지 못하면 내 것을 제 것인 양 막 가져다 쓴다. 그러고는 또 아무 데나 둬서 나까지 곤란하게 만든다. 잔소리가 지겨운 나는 내 것까지 그 사람의 비상용으로 헌납하고 웬만한 것엔 안 보이는 대로 그냥저냥 산다. 급할 때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확대해서 보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싸돌아다녀 바닥난 내 스마트폰을 밤새 충전 중인데 이 정도 작은 일로 다시 꺼내와 쓰기는 싫었다.


사람의 행동에 어디 한 가지 동기만 있겠는가? 일일이 알아낼 수 없는 다양한 조합의 이유로 나는 꼼짝도 않고 어둠 속에 가만히 누워 머리만 대충 굴렸다. 논리가 엉성했지만 그냥 내 추측을 믿기로 했고, 아니어도 큰 문제없을 거라고 '대충' 생각했다. 뜨거우면 끄면 되는 거 아닌가. 뭐가 문제인가. 이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였다. 개선을 위한 몸짓보다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더 편해졌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뭐든 별로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래서 ‘노인들이 혁신보다는 보수를 택하는 것이구나’ 이해했다. 어쨌든 최저 온도로 맞춰놓고 미적지근하게 잠을 자고 나니 남편은 깊이 푹 자서 개운하다고 말을 바꿨다. 나도 매트리스 벼랑 끝으로 도망쳐서 내 몸을 아슬아슬하게 걸쳐 놓고 자지 않으니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만리장성은 없다. 


내 뇌가 노화되고 있구나!


하지만 대신 내 마음에 위기감이 올라왔다. 그 작은 일상의 콩트에는 내 정신이 늙어가기 시작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가만히 뒤돌아보니 이미 그런 변화들이 의미심장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나와 남편의 이 모든 웃기지도 않은 변화를 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해졌다. 도서관으로 달려가니 그 사이 뇌신경학 관련 서적들이 줄줄이 출간되었다. 남녀의 뇌 차이나 사춘기의 뇌에 대한 책이 나왔다고 희귀하게 여기며 좋아했던 게 불과 몇 년 전인데, 이제는 노인뿐 아니라 중년의 뇌에 대한 책들도 따로 나와 있다. 허겁지겁 탐독하기 시작한 나는 이내  '아, 이런 것이었구나' 이해했다.



서둘러 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책

중년에 들어서면서 뇌가 노화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맞다. 뇌과학적으로는 중년을 40~68세로 잡는데, 뇌가 아주 변화무쌍하고 개인 편차가 심한 연령대다. 노화되면서 잃는 것은 누구나 비슷하지만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강화하고 재조직하는 기능들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아주 크다. 


사후 뇌를 기증받아 부검해보니 심각한 상태의 알츠하이머 말기였음에도 죽기 직전까지 총명하고 건강하게 아무런 증상도 보이지 않고 살다 간 노인들에 대한 연구 발표들을 보았다. 그 모든 것이 암시하는 것은 뇌가 중년에 중차대한 갈림길에 서게 되고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며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뇌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줘


그럼 무엇이 우리가 동일하게 경험하는 노화의 증상일까? 중년이면 누구든 똑같이 하소연하는 소리는 사람의 이름과 고유명사가 눈에 띄게 흐려지고 생각나지 않는 단어가 하나 둘 늘어난다는 것이다. 나와 남편도 마음은 굴뚝같은데 단어는 빨리 떠오르지 않으니 아무 단어나 일단 뱉고 보는 버릇이 생긴 지 이미 오래다. 급한 마음에 서로 다른 ‘그거’ ‘저거’를 한 문장에 마구 구겨 넣을 때도 많다. 다행히 문맥을 파악하는 감은 예전보다 더 좋아져서 서로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 하지만 바깥에서 그런 내 편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 창피에 익숙해지는 기술을 터득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은 기억 저장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어휘력은 나이와 함께 증가하고 노년으로 가도 유지가 잘 되는 편인데, 기억된 것을 인출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겨서 그러는 것이다. 단어의 음운과 개념은 뇌의 각각 다른 영역 안에 저장되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나이가 들면 그 둘 사이의 연결이 약해져서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음운의 형태로 바로 뱉어지지 않으니 혀 끝에서 맴도는 안타까운 단어들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나 물건, 지명과 관련된 세부 정보는 뇌 곳곳에 숨겨져 있는 광범위한 정보를 구체화시키므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인출될 수 있지만, 그것들과 이름을 연결하는 고리는 너무 임의적이라서 고유명사가 가장 먼저 설단 현상을 보이는 항목이 된다. 


기억력의 감퇴


물론 나이가 들면 기억 자체가 약화되기도 한다. 자기가 겪은 사건에 대한 ‘일화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먼저 각인의 힘이 약해진다. 유독 그 기억력이 뛰어났던 나는 감히 내게 벌어진 일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기억을 입증하는 완벽한 기록까지 갖추고 있는 나를 당할 재간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나는 메모광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기억이 반듯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안개 낀 듯 뿌옇고 손에 잡히지 않았으며 아예 입력이 안 된 사례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그럴 리 없다고, 네가 틀린 거라고, 심지어 모함하지 말라고 우겼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별 수 없이 나는 기억에의 의존도를 낮추고 더 시시콜콜 메모를 늘렸다. 심지어 대청소 날에는 물건들을 어디에 정리했는지까지 기록했다. 똑같은 것을 자꾸 사거나 필요한 것을 찾지 못해 절절매는 실수를 그렇게라도 줄여보려고 애썼다. 물론 의논 없이 아무 데나 물건을 옮기는 남편 때문에 다 소용없는 짓이 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떨어뜨리는 것이 노화의 미덕임을 차츰 더 깊이 알아갔다. 


주의집중의 문제


하지만 복병은 다른 데 있었다. 뭔가를 하려고 걸어왔다가 뭘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려서 한참을 서 있는 우스운 순간들이 늘어났다. 중년이 되면 사소한 어떤 것조차 집중하고 있는 사고를 쉽게 흐트러뜨린다. 주의 집중은 무언가를 더 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기능이 작동한 결과다. 행동의 효율성과 일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뇌가 현재의 목표와 관련 있는 정보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나이가 들면 과제 수행에 무관한 정보를 억제하는 뇌의 능력이 줄어들고 그로 인해 산만해진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탈수초화’ 때문이다. 


뉴런과 미엘린 수초


수초 탈락

영어로 ‘미엘린’이라고 부르는 ‘수초’는 신경세포인 뉴런을 감싸고 있는 지질막이다. 전선을 감싸는 고무막과 같이 절연체 역할을 해서 신경세포 내 전기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전달하는데 기여한다. 그런데 노화와 함께 그것이 풀리기 시작한다. 탈수초화가 되면 정보처리의 효율성이 떨어지면서 신경의 잡음 수치가 증가한다. 애초에 수초는 늦은 나이에 형성되는 뇌구조로 우리 뇌의 집행기관이자 집중과 관련된 전두엽에는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걸쳐 수초가 완성된다. 이렇게 느리게 절연을 한다는 것은 청년기까지는 정보처리의 효율성보다는 산만함을 대가로 지불해서라도 창의적 연결과 확장을 가능하게 하라는 의미일 수 있다. 물론 노화의 탈수초화는 감퇴로 인한 것이지만 그래도 결과는 비슷하다. 성인기 내내 생산적인 업무를 효과적으로 하며 시달리던 뇌에게 이제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다르게 반응하라고 하는 것이다. 


초기 모드 영역의 활성화


중년의 산만해짐과 관련된 또 다른 흥미로운 발견이 있다. 젊은이들은 집중할 때 전두엽 중에서도 배외측 전전두피질이란 곳을 가장 많이 활성화시킨다. 그런데 중년이 되면 그쪽은 덜 사용하고 대신 ‘초기 모드 영역(Default Mode Network)’이라고 불리는 곳을 더 많이 사용한다. 약자로 DMN이라고 부르는 이 영역은 특정 과제 작업 중에는 억눌려 있다가 휴식 중에 활성화되는 곳이다.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다가도 금방 멍해지는 중년의 모습은 이 DNM이 꺼지지 않고 있어 속으로 중얼대는 백일몽 상태에 스르륵 빠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두엽의 억압 장치가 필요한 만큼 빨리 가동되지 않으면 처음부터 신경적 '잡음'을 너무 많이 듣게 되니 그로 인해 쓸모없는 정보에 지친 뇌가 휴식을 취하느라고 초기 모드로 멍하게 가 있는 것일 수 있다.   


초기 모드 영역

하지만 DNM이 꺼지지 않는 것은 노화의 증상이지만 동시에 뇌가 새롭게 적응한 방식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주의가 여러 곳에 미치고 집중이 잘 안 되는 상태에서 중년이 상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하느라고 그러는 것이라는 말이다. DNM은 쉬고 있을 때 뇌의 안팎에서 발생한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평가하는 일종의 ‘파수꾼(sentinel)’ 역할을 하는 곳이라서 그런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적응하는 뇌


우리 뇌가 노화하는 자신에 계속 재 적응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나이와 함께 여러 체계의 기능이 조금씩 감퇴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 뇌에는 다양한 상쇄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부위를 동원해서라도 문제를 보완해가는 것 같다. 그중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이 ‘양측 편재화'다. 


우리 뇌는 뇌량으로 연결되어 서로 소통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좌반구와 우반구로 나뉘어 각자 맡은 일을 담당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이 반구의 비대칭성이 줄어든다. 한쪽 뇌에서 했던 일을 점차 양쪽 뇌에서 하게 되는 것이다. 학자들은 양쪽 뇌를 다 사용하는 중년 뇌의 요령에서 뒤늦은 창의적 사고와 해법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양 반구를 모두 사용해서 신경적으로 정보를 통합하면 사고와 느낌이 더 쉽게 화해되고 그 과정에서 더 큰 패턴을 보고 더 큰 생각을 하며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육과 경험의 축적 치는 전두엽에 많이 쌓여 있다. 그곳의 자원을 계속 불러내어 쓸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뇌력을 유지시킬 수가 있다. 노화되면서 뇌세포가 줄고 뉴런의 가지 수도 줄지만 남은 가지들을 잘만 연결하면 뇌세포 간 '대역폭'이 커져서 처리 속도는 3,000퍼센트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미엘린이다. 미엘린 역시 나이와 함께 쇠약해지지만 건강한 사람이라면 60대까지도 계속 그것을 만들어갈 수 있다. 특히 전두엽에서 더 그러한데, 강력하고 끈질기며 효율적인 이 신경 연결망과 복구 시스템을 전두엽에 비상용으로 비축해둘 수만 있다면 노화로 인해 감퇴되는 것들에 최대한 대항할 수 있다. 그러려면 전두엽을 계속 자극해서 써야 한다. 


이에 덧붙여 또 다른 중년의 힘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편도는 부정적인 자극에 분명 점점 더 많이 반응하는데, 그럼에도 중년의 뇌는 긍정적인 쪽으로 치우쳐서 젊었을 때보다 쾌활하고 행복해지는 경향이 있다. 뇌 스캔을 이용한 한 실험 연구를 보면, 부정적인 자극이 제시되었을 때 중년의 피실험자들의 뇌는 본 것을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편도가 작업에 들어가서 긍정적인 것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삶에 대해 기뻐하고 좋은 것을 보기 위해 작정한 뇌처럼 움직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뇌의 변화에는 진화적 이점이 있다. 앞날을 더 밝게 보는 나이 든 어른과 함께 있는 젊은 집단이 더 오래 산다는 통계를 제시하면서 학자들은 “지혜로운 어른들이 옆에 있으면 아이들을 사자에 내어주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전두엽 중에서 감정 통제를 많이 다루는 안와 전두피질은 다른 구역들보다 노화에 따른 위축 속도가 훨씬 더 느린데 그 덕분에 우리는 감정 통제를 점점 더 잘하게 되어 단순히 쾌활하고 행복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젊었을 때보다 더 평온하고 침착하며 지혜로워질 수 있게 된다. 뇌가 우리를 이끌고 가는 데로 잘 반응해가면 사회에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늙음을 축복으로 볼 수 있는 여지


갱년기를 전후로 나는 강의하고 글 쓰는 데서 상당한 변화를 경험해왔다. 40대까지는 강단에 서서 돌발 질문이 들어와 답을 해주거나 다른 사례나 관점을 즉석에서 보충해주어야 했을 때, 옆길로 얼마나 새든 돌아가야 할 핵심으로 항상 잘 찾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상한 데서 이야기의 끝을 맺었고 심지어 ‘여기가 어디지? 어쩌다 여길 왔지?’ 하며 의아함과 당황스러움에 머리가 하얘졌다. 두어 번 경험한 것이지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쿵 뛴다.


글을 쓸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는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개요를 철저하게 잡아놓고 집필을 시작하게 하면서 나 자신은 항상 그냥 썼다. 내 머릿속에 구조와 흐름이 다 있었기 때문에 그냥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쓰기만 하면 알아서 제 갈 곳으로 다 잘 흘러갔다. 그런데 이제는 짧은 원고를 하나 쓰면서도 내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몰라 중간중간 자꾸 손에서 놓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고, 공정이 너무 달라지니 내 글에 확신도 서지 않는다. 글과 말을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다듬어온 내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불편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속전속결 거침없는 스타일 때문에 글이 금방 나왔지만 대신 쪼물거리는 손맛이 없었다고 할까, 잘 무르익은 글은 안 나온다고 할까, 그런 글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느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이 과도기가 나를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긴다. 중년의 뇌는 세상에 대해 전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하게 반응함으로써 대응 속도를 늦추고 충동적인 행위를 억제하는데, 나도 내가 가진 거침없음이 단순하고 투박하게 여겨져 뭔가 더 깊은 것을 찾아 머뭇머뭇 헤매는 면이 없지 않다. 


노화를 겪는 전문가들은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을까? 명성을 떨치게 도왔던 자신의 재능을 좀 먹고 들어오는 늙음을 처음부터 반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는 사람들은 뇌가 가진 가소성의 힘을 최대한 발휘해서 결국 놀라운 기량으로 더 깊어지며 거듭난다. 


Steve Gadd

미국의 드러머 스티브 갯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2006년에 60세를 넘긴 그의 공연 영상이 DVD로 판매되어 역시나 드러머인 내 사촌동생이 얼른 구입해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새 늙은 동생의 영웅이 몹시 안타까운 연주를 하고 있더란다. 그가 앨범 작업을 눈에 띄게 줄이고 활동도 뜸하게 한 시기와 맞물려서 동생은 그의 생명이 끝나감을 직감하고 씁쓸해했다. 그런데 10년 뒤 다시 나온 그의 영상을 우연히 본 동생은 깜짝 놀랐다. 움직임은 분명 한창때보다 더 둔해졌는데 어떻게 그렇게 욕심 없고 거침없는 다이내믹한 소리가 나오는지 너무 신기해서 같은 영상을 30번 넘게 보고 또 보았다고 한다. 가장 최근의 연주 영상을 찾아본 내 동생은 스티브 겟은 재개했고 더 훌륭해졌다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하긴 속구 투수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하는 투수들 중에도 시간이 흐르면서 공의 속도가 떨어지면 커브나 슬라이더, 변화구 등 다른 투구를 충분히 개발해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선수들이 있다. 모두가 그렇게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이후의 내 발전 상황을 침착하게 지켜보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 


중년의 뇌가 나를 더 행복하게 유쾌하게 만들어준 건지는 몰라도 나는 나이 먹는 게 기쁘다. 방황만 하던 힘없는 20대와 달리 사회에 뛰어들어 경험을 쌓으며 현실적이 되었던 30대, 패기만 넘치던 30대와 달리 완숙해져 가는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이 커졌던 40대, 자만심 가득했던 40대와 달리 나 자신을 처음부터 다시 보며 재조정할 여유를 갖춰가는 50대, 매 순간 다가오는 변화가 나는 좋고 고맙다. 내가 가장 기대하는 순간은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이다. 늘 주인공으로 중심에 우뚝 서서만 살았는데 이제는 순해지고, 묻혀 있고, 작아지고 싶다. 그래서 세상에 더 잘 어우러지고 잘 쓰이고 싶다. 세계를 다르게 보고 싶지만 나 스스로는 틀 거리를 잘 바꿀 수 없어서 그러기가 쉽지 않다. 만약 노화가 내게 변화의 계기를 계속해서 안겨준다면 어쩌면 나도 많이 달라질 지 모르겠다. 내게 ‘순해진 귀’는 어떻게 체험될지 사실 많이 설렌다. 


그런데 이렇게 늙어 변해가는 나의 본질은 무엇일까?. 되어가는(becoming) 존재로 변해가는 것인가, 아니면 본질은 같고 그 외 현상들만 다른 것인가? 


다시뉴스 발행인 박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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