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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ug 16. 2022

[공동체라는 이야기] #9

공동체의 슬픔과 기쁨

공동체의 슬픔


몇 해 전에 일본에서 '증발' 또는 '자발적 실종'이라 부르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신과 연관된 모든 것과 한순간에 절연하지 않으면 더는 살 수 없는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생각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다 버려서라도 무언가 이어가 보려는 시도로 읽히기도 한다.



엉뚱하게도 나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상을 해봤다. 머릿속에서 거의 실행 단계까지 갔는데, 끝내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미 ‘두 번째 인생’을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증발을 통해 얻은 새 인생이 버리고 온 인생에 대한 기억으로 내내 무거울 것 같아서 차마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다음 생이 가볍지 않다면, '자발적 실종'이 성공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모르지 않을 텐데, 인간관계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는 개인이 가벼워지기 위해서다. 우리가 좋은 공동체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개인을 살리기 위해서다. 나는 공동체가 개인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해단하는 단체가 있는 것처럼, 공동체도 해체할 수 있다. 적절한 때에, 이를테면 소임을 다해서 모두가 웃으면서 떠나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단체나 공동체를 더는 유지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만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는 것도 나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개인의 희생을 통해서 공동체가 연명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무거워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공동체 입장에서나 개인의 입장에서 너무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연민: 자발적 부대낌


하지만 거기에는 아이러니도 존재한다. 20세기 인도의 구도자 사두 선다 싱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히말라야의 눈보라 속에서 부상당해 걸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난다. 동행한 이는 안타깝지만 도와주다가 우리도 위험해질 수 있다면서 혼자 가고, 선다 싱은 그를 등에 업고 걷는다. 나중에 혼자 길을 떠난 사람은 저체온증으로 죽게 되었는데, 선다 싱과 부상자는 서로의 체온 덕분에 무사했다는 이야기다.



지난 십여 년. '내가 건너는 강의 여울목은 물살이 어찌 이리도 험한가?'라는 이윤기 선생님의 문장에 몇 번이고 밑줄을 치며 나도 세상과 나를 다독이면서 버텼다. 그런데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나를 가족 삼아 준 사람들의 체온이 나 대신 지며리 하게 내 '자발적 실종'의 가능성과 싸워준 것은 아닐까. 아마 가족에 대한 내 책임감만으로 버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나는 여전히 선다 싱 이야기에 담긴 삶의 진실을 생각한다. 부대끼지 않는 삶은 소멸한다.


지난 글에 보편성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가족적인 것이 '연민'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고 썼다. 연민의 사전적 의미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인데, 여기에 선다 싱의 이야기를 보태면 '남 일 같지 않음', '지나칠 수 없음' 정도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연민의 뜻매김은 '자발적 부대낌'이다. 보편성의 위기를 돌파한 공동체의 방편이 연민이 될 수 있다면, 그 공동체에는 연민, 곧 자발적 부대낌을 선택한 사람들의 온기가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기쁨


그렇다면 공동체의 기쁨은 무엇인가? 좋은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쓴 「나란 무엇인가」에 쓰인 '분인(分人)'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히라노는 인간의 기본 단위를 '개인에서 분인'으로 바꾸어 볼 것을 제안한다. 개인(individual)은 더는 쪼갤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유일무이한 '진정한 나'라고 하는 신화를 만들어 낸다. 반면 분인(dividual)은 인간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한다. 히라노는 '한 명의 인간은 여러 분인의 네트워크'라고 설명한다. 각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따라 여러 분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이다.


사랑이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인데, 히라노는 여기 한마디를 덧붙인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 덕분에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울을 보며 '나는 내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내 모습을 좋아하게 되는, 곧 타인을 경유해서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책과 강연(「Love others to love yourself」, TEDxKyoto 2012)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이별(사별)'에 관해 말하는 부분이었다. "이별(사별)의 슬픔이란,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만 보이던 자기 모습을 더는 살 수 없게 된 것에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TV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이용식이 음식을 과장해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셔서 내가 할머니 앞에서 그 모습을 흉내 내면 늘 환하게 웃어주셨다.



우리는 자신의 긍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좋은 공동체는 우리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한다. 공동체의 기쁨이란 공동체를 통해 가벼워지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을 긍정하는 길이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연재였다. 출발점에 다시 서서 이 연재를 마친다. 타인과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자아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좋은 공동체를 찾아보길 바란다. 만나기 쉽지 않겠지만, 찾으면 있다.


다시뉴스 필진 한정훈

** 본 시리즈는 #9로 완료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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