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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하 Nov 07. 2022

25살 여자 신입의 반전

나만 잘하면 돼!


25살 여자 신입사원이 내 밑으로 들어왔다.


가장 어린 사람이 30대 초반, 나이 많은 사람은 40대 초반이고 팀장님은 50대. 모두 석사와 박사 출신. 누가 봐도 공돌이 향기, 아니 냄새가 가득한 남자 7명으로 이루어진 팀에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25살. 여자. 학사 졸업.


출처: pixabay.com


2019년 1월에 내가 입사한 이후로 우리 팀은 2년 6개월 동안 인력 충원 없이 운영됐다. 2021년 7월, 드디어 우리 팀에도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일단 오래간만의 인력 충원이니 좋았고 직속 후배가 생기는 거라 더 좋았다.




걱정의 시작.


하지만 신입사원이 우리 팀에 잘 적응하지 못할까 봐 동료와 걱정을 하곤 했다. 내가 속해있던 팀은 CTO 연구소여서 95% 이상이 석사, 박사를 졸업한 선임 연구원, 책임 연구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도 내 주변에는 학사를 졸업한 사원 직급이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 팀 팀장님은 업무 관련해서 깐깐하기로 다른 사이트까지 소문난 분이었다. 매주 두 번, 회의 때 각자 팀장님에게 발표 자료를 준비해서 직접 업무 보고를 해야 한다. 칭찬과 융통성보다는 냉철한 비판과 FM이 훨씬 어울리는 분이다. 나도 작년에 팀장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팀에서 여자 혼자 지내야 하고 그것도 학부 졸업하고 바로 입사하는 아주 어린 신입사원. 나이 많은 남자들 사이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깐깐한 팀장님 밑에서 업무하고 딱딱한 환경에서 지내는 게 만만치 않을 텐데 괜찮을까? 회사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근데 나이 많은 사람이 챙겨주는 걸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내 걱정은 신입사원이 본격적으로 업무에 투입되기 전까지 계속됐다.




나보다 더 잘하는 신입사원.


신입 교육을 마치고 입사한 지 두세 달쯤 지나 업무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걱정에 대한 답이 나왔다. 신입사원은 경력 5년 차인 나'만큼' 잘했다. 솔직히 일머리가 나'보다' 뛰어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에게 1대 1로 보고를 자주 해서 스트레스를 받지만 좋은 점도 있다. 남들이 어떻게 일하고 발표 자료를 어떻게 만드는지, 그리고 발표를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울 수 있다. 덕분에 신입사원의 발표도 들을 수 있었다.


신입사원은 처음 접하는 복잡한 데이터와 코드를 가지고도 분석을 잘했다.


<어떤 의도로 이 데이터들을 분석했고 - 어떤 목적으로 코드를 바꿔 실험을 했고 - 결과를 정리해보니 이런 관계가 있었다 - 다음엔 이렇게 해볼 계획이다>


나를 포함한 팀원 중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위와 같은 방식으로 발표를 했다. '일머리'가 뛰어다. 나는 일머리가 없다. 저렇게 일하라고 알려주고 싶어도 몰라서 못 알려줬을 거다. 오히려 내가 신입사원의 발표를 보며 배웠다.


나는 석사를 했고 회사를 다닌지 3년이나 됐어도 위 방법대로 발표하는 게 낯설었다. 노력은 했지만 팀장님에게 체계적으로 일하라는 지적을 자주 당했다. 신입사원은 잘했다.




신입사원에 대해 캐묻기 시작하다.


신입사원은 석사를 한 것도 아니고 AI분야나 우리 회사 분야를 따로 공부했던 것도 아니었다. 나이가 많아서 다른 경력이 많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잘할까 궁금했다. 나는 신입사원에게 회사에 들어온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잘하냐며 칭찬을 하면서 대학교 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 집요하게 물어봤다. 계속해서 물으니 신입사원도 천천히 하나둘씩 말을 해줬다.


'대학교 때 수업 프로젝트가 있으면 팀장도 많이 했고 자주 밤새면서 열심히 했어요. '

'학기가 끝나고 방학 때도 공모전에 참여했어요'

'토플 성적이 100점 가까이 돼요'

'대학원에 안 갔지만 학부 연구생으로 인턴 하면서 해외 저널을 썼어요'


신입사원이 쓴 해외 저널을 찾아보니 IF가 10 정도 되었다. 웬만한 박사도 내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이유 없이 잘하는 게 아니었다. 신입사원만의 경험과 재능, 노력이 있었다. 이렇게 신입사원의 실력에 대한 의문이 하나씩 채워질 때쯤, 나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미래는..?


어린 신입사원이 바로 옆에서 잘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다 보니 나에 대한 성찰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가만 보자...... 나는 34살. 석사 졸업. 회사 5년 차... 왜 이 정도 실력밖에 안 된 거지?' 내 실력에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 석사, AI, 대기업이란 꼬리표를 다 떼고 내가 경쟁력이 있는지 생각해봤다. 앞으로 5년 뒤, 10년 뒤 어떤 개발자일지, 어떤 엔지니어 일지가 뻔해보였다. 그렇게 되기는 싫었다.  


신입사원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싹튼 생각은 반년도 안돼서 '신입사원의 퇴사가 아닌 나의 퇴사'로 이어졌다. 퇴사할 때 팀장님과의 면담에서 신입사원 얘기도 꺼냈다.


"제 선배들, 책임님들이야 저보다 잘하시는 게 맞지만 신입사원이 저보다 잘한다고 느꼈어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여기에 계속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팀장님은 끄덕거리면서 "그래, 신입사원이 자기가 생각한 걸 잘 정리하고 발표하는 걸 잘하긴 하지." 라며 인정하시곤 내가 작성한 퇴직서에 사인을 해주셨다. 그래. 나도 느꼈는데 20년 넘게 회사 생활한 팀장님은 더 잘 아셨겠지.


그렇게 나는 학교, 석사, AI, 대기업 꼬리표를 다 떼고 블록체인 스타트업에 주니어로 입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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