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무심한 듯 툭, 던져진 음성이 나를 때립니다. 그러게요, 나는 누구일까요. 일단 나는 한 여자입니다. 나이를 많이 먹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근심 하나 정도는 안고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여자.
...당신은 누구인가요?
...아니요. 사실 나도 누군가에게는 특별하고 싶어요. 나는 추한 욕심에 휩싸이기도, 눈 먼 질투에 이성을 잃기도, 어리석기도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고귀함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답니다... 어둠이 흠뻑 젖은 구름 사이로 간간이 빛이 비춰지네요. 먹구름 사이를 헤아리다 보면 해가 어디있는지는 찾을 수 없지만 결국 빛이 우리의 온 몸을 비추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요.
(밤의 파도가 밀려온다)
당신은 아시나요. 밤의 파도가 밀려오는 그 절정의 순간을. 그 아름다움을. 멀리서 새하얀 달은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공기는 새벽과 밤과 낮 그 어디 즈음이 되어 서늘히 떨립니다. 분홍빛을 머금은 구름은 파도의 결이 되어 자랑하듯 아름다움을 뽐내고, 산의 노래는 절정으로 치솟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린 영혼들은 불꽃놀이를 하듯 손을 잡고 신나게 춤을 추지요... 하지만 그 순간은 무엇보다 빨리 지나가버리고, 어느새 아름다움을 굳게 감싼 어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릴 지켜봐요... 우리는 매일 하루의 일생을 지켜보는데도 정작 우리 자신의 일생은 느끼지 못하고 있지 않나요. 참 슬픈 일이에요.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 안에서 서서히 금빛 광채가 드러났다. 일렁거리는 눈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이 오직 한 군데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가 생각하다보면 최후의 밤이 떠올라요. 수많은 밤의 파도가 지나고, 마지막 절정의 파도를 지나 어스러질 순간이. 하늘빛, 주홍빛, 분홍빛, 보라빛을 지나 컴컴한 어둠만을 맞이할 때 말이에요. 육신이라는 짐을 놓고 갈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몽롱한 언어들이 날 맞이해주지 않으면 어쩌나.. 초조해져요.
어느새 그들의 형체는 어둠에 가려지고 빛나는 그의 눈동자만이 묵묵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의 눈에서 반짝이던 금빛 광채는 순간 꺼져버리고 나이 든 피로함만이 피어오른다. 여자는 내가 쓸데 없는 이야기를 했네요, 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여자는 뒤돌아 문을 열고 나간다.
남자는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