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프로젝트] 23년 10월 5일 아침의 글
A : 따뜻한 커피는 분명한 사치다. 날이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사치스럽다.
B: 커피는 본래 따뜻한 아니 뜨거운 온도로 추출되는데? 만들어지길 고온인 것을 어떡하라고? 그럼 차라리 모든 커피가 사치라고 하면 되지 '따뜻한'이라는 조건을 붙일 이유는 무엇인가?
A : 마시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렇다. 더운 여름날 우리는 아메리카노라는 메뉴명 앞에 '아이스'를 꽤 당연히 생략할 정도로 찬 커피를 많이 마신다. 돈을 주고 음료를 받아 들었으니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까만 액체가 최대한 오래 같은 효용(시원하고 씁쓸하니 향기롭기)을 유지하는 일일테다. 첫 모금은 당연히 시원하지만 요즘의 거짓말 같은 여름 날씨에 얼음은 맥을 못 추리고 녹아내리기도 한다. 근데 정작 찬 기운을 다 빼앗겨 미지근해질지라도, 더운 여름엔 체온보다 낮은 온도의 음료라는 특성만으로도 제법 용서가 된다.
B : 음..
A : 그럼 겨울엔 어떠한가? 모자, 목도리, 장갑으로 살갗은 모두 가릴지라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하는 인간 유형이 이름까지 붙여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들고 있자면 손이 시린 음료일지라도, 겨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마지막까지 '찬 음료'라는 그 소명을 다한다. 그 말은 즉슨, 처음 받아 들었을 때부터 한참을 마신 뒤에도 커피의 온도나 맛에 큰 변화가 없다는 소리다. 실내에서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사실 히터 속에서 쩍쩍 갈라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얼음은 무척 반갑다.
B : 얼죽아 인간이 분명하다.. 따뜻한 커피에 대한 생각이 어떠하길래 아이스커피를 싸고도는가?
A : 말한 대로 사치다. 여름에 핫? 나는 여름에 따뜻한 커피 주문하는 사람을 마주하면 한 번 스윽 하고 쳐다본다. '가능한가요...?'라는 말을 눈동자에 담고서. 아마 냉방기가 열심히 돌아가는 환경에 주로 머무르는 사람이겠지? 굉장히 부러운 팔자다. 또, 따뜻한 커피를 테이크아웃할 때의 고충을 다들 알 텐데. 산뜻하게 받아 들은 커피일지라도 걷다 보면 조금씩 넘쳐흐르게 되어있다. 분명히 뚜껑이 잘 닫혀있고 내가 커피를 들고뛰고 있지도 않은데 참 묘한 일이다. 조금씩 새어 나오는 뜨겁고 찐득거리는 액체는 손과 옷에 묻는다면 한층 더 최악이다. 기분이 잡치더라도 목적지까지는 열심히 버텨보는 것이다. 그마저도 추운 날씨라면 커피는 금방 식어 얼음만 없는 아이스커피와 가까워진다.
B : ...
A : 그럴 때면 생각한다. 겨울마저도, 따뜻한 커피는 후루룩 들이켤 음료가 못되는구나. 쾌적한 온도의 실내에서, 도자기와 유리에 담겨 테이블 위에 소중히 올려져야 하는, 대단한 존중이 필요한 음료겠구나. 곧 축축해질 종이컵, 열기에 흐물흐물해지는 플라스틱 뚜껑 그리고 바쁜 보행자는 커피의 타고난 운명을 거스르고 있다. 슬픈 말이지만,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서 여유로이 손잡이 달린 컵을 들고 내릴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던가.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실내에서 선호하는 온도의 음료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대단한 행복인가. 이런데도 따뜻한 커피가 사치가 아니라고?
B :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A : 퇴사하고서야 알았다. 컵과 소서를 챙겨 따뜻한 커피를 차려마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를. 지난 세월 출근길, 점심시간에 들이켰던 커피와는 비교할 수 없게 소중한 한 잔이다. 따뜻한 커피가 생각나는 계절에 가까워지고 있는 만큼, 모두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사치를 부릴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사치스러운 것들 중엔 제일 저렴하지 않은가.
B : ! .. (호로록)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