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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코 Aug 12. 2023

호텔과 맥주의 브랜딩 차이

호텔 방을 팔았습니다. 2018년 제주에서 시작한 일이죠. 4년이 지나 서울에서 맥주도 팔았습니다. 회사에서 제 역할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브랜딩과 마케팅을 수단으로 상품을 지속적으로 잘 팔리게 하는 일입니다. 파는 상품이 호텔에서 맥주로 바뀐 후,  6개월 정도는 혼란의 시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일을 하면서 개운치 못한 순간들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퇴근길에는 오늘을 곱씹어야 했습니다. 여행을 준비해 보셨다면 대부분 공감하실 텐데요. 고객이 여행지의 호텔을 예약할 때 길게는 수개월 전부터 탐색을 시작해서 한 도시의 숙소 대부분이 비교 대상에 오릅니다. 그에 비해 맥주는 퇴근길에 집 앞 편의점에 들러 구매할 정도로 즉흥적이고 즉시적입니다. 편의점에 들어선 후에도 냉장고를 10초쯤 탐색하려나요. 탐색부터 구매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매우 짧습니다.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할 때 소비자가 정보탐색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정도를 ‘소비자 관여도'라고 합니다. 호텔과 맥주, 소비자 관여도가 극과 극에 있는 두 상품을 브랜딩 또는 마케팅을 하면서 겪게 된 혼란이었던 거죠. 이번 글에서는 고관여 상품인 호텔과 저관여 상품인 맥주를 팔면서 깨달은 것들을 고객 관점에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호텔은 왜 예약하고 맥주는 왜 마시는 걸까

여행지 호텔의 본질적 니즈는 여행을 위한 쉼입니다. 오늘의 여독을 풀고 내일의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하룻밤 잘 수 있는 숙소가 필요합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잠자리 니즈 Needs만으로 숙소를 예약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집이 아닌 곳에서의 하룻밤'을 기대하는 고객을 위해서는 다양한 원츠 Wants를 충족해야 합니다. 푹신한 침대와 바스락거리는 새하얀 이불, 커튼을 열면 들어오는 바다 뷰, 전화 한 통에 객실 안까지 서빙되는 조식, 언제나 친절히 응대하는 직원들.. 이처럼 호텔은 우리 집에는 없는 기분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마도 호텔업은 인간의 욕망을 가장 극단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비즈니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맥주가 처음 들어온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입니다. 이후 약 80년간 우리는 딱 한 가지 종류의 맥주에 빠져 살았는데요. 바로 라거 Lager맥주입니다. 직장의 회식 문화가 라거 맥주의 부흥을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맥주 광고에는 세 가지 클리셰가 있는데요. 첫째, 당대 가장 유명한 남성배우가 등장합니다. 둘째, 캬~하고 마시는 모습이 클로즈업되고요. 셋째, 직장 회식 자리가 광고의 배경입니다. 오랜 기간 한국의 맥주는 산업 역군들의 사회적 관계를 돕는 윤활유 역할을 했습니다. 요즘은 어떨까요. 1인 가구의 증가와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홈술, 혼술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사회적 관계 유지보다는 개인의 만족이 중요해졌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거나 혼자서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2020년 1월을 기점으로 편의점 맥주 매출은 전년대비 35%나 증가했습니다. 오늘날 맥주는 퇴근 후의 위로, 주말의 여유, 땀 흘린 후의 쾌감 등 일상의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증폭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호텔: 여행을 위한 쉼, 높은 수준의 환대 경험

맥주: 사회적 관계 유지, 일상의 순간에 의미 부여/증폭



구매 결정, 어떤 기준으로 하는가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고 항공권을 예매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숙소를 예약해야 하니 OTA서비스에 접속합니다. 여행할 도시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습니다. 여행 예산을 고려해 ‘가격’ 범위를 설정하고 ‘평점’이 높은 순으로 세팅합니다. 이제 똑똑한 서비스가 숙소를 차례로 보여주는군요. 숙소를 하나하나 들어가서 사진을 살펴봅니다. 스크롤을 내려 친절도, 청결도, 편의성, 접근성에 매겨진 점수와 후기도 꼼꼼히 살피며 도착 날 하루 묵을 곳을 찾습니다. 출발까지는 아직 3개월이 남았습니다.  

하루종일 이어진 회의 때문에 지친, 퇴근길 직장인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갑니다. 시원한 맥주가 당기는군요.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냉장고를 스윽 둘러봅니다. 늘 마시던 하이네켄과 칭따오 하나를 먼저 꺼냅니다. 얼마 전 지인이 추천한 흑맥주 하나도 담고요. 마지막으로 처음 보는 수제맥주 하나도 담습니다. 만원을 내고 가게를 나섭니다.  


호텔: 위치, 가격, 친절도, 청결도, 시설편의성, 교통편의성

맥주: 마시던 것, 추천받은 것, 새로 나온 것


맥주는 기준이 좀 이상합니다. 맛, 스타일(라거, 에일 등), 디자인과 같은 요소가 아니라 일정한 구매 패턴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4캔 만원’때문입니다.      



4캔 만원 맥주의 시대

2000년대 초 수입맥주가 국내 상륙합니다. 맥주는 라거뿐인 줄 알았던 소비자는 다양한 맥주의 맛에 눈을 뜨게 됩니다. 시원하고 목 넘김이 좋은 건 줄만 알았는데 수입맥주를 마셔보니 국산맥주가 밍밍하더라는 거죠. 오줌 맛 맥주라는 둥 대동강 맥주(북한 맥주) 만도 못하다는 둥 이 당시 국산 맥주의 체면은 영 말이 아니었습니다. 맛도 맛이거니와 맥주 하면 서양이 본류이니 본토에서 온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입맥주에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편의점에서 수입맥주 4캔을 묶어 1만 원에 파는 이벤트를 합니다. 2010년 즈음의 일입니다(4캔 만원 이벤트를 기획한 편의점 직원은 맥주 시장을 이렇게나 뒤집어 놓을 줄 알았을까요). 지금 우리는 ‘4캔 만원'이 국룰(최근 1만 1천 원으로 인상되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상징적 의미로써 4캔 만원을 사용하겠습니다)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2020년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수제맥주가 경쟁에 가세합니다. 4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기 위한, 바야흐로 맥주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것이죠. 

자체적으로 진행한 소비자 조사에 의하면 소비자는 4캔 중 2-3캔을, 마셔본 맥주 중 선호하는 맥주로 먼저 채우고 1-2캔은 새로운 맥주를 시도하는 경향이 발견됩니다. 4캔을 구성하는 데에 ‘안전’과 ‘도전’이라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죠. 안전추구형 소비자는 안전과 도전이 3:1, 도전추구형은 2:2 정도의 비율로 4캔을 채웁니다. 두 유형 모두 실패의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아는 맛’을 50% 이상 먼저 채운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1번 시드는 매번 같은 맥주이고 4번 시드는 매 구매마다 바뀝니다. 4캔 만원에 같이 묶이지만 1번 시드인가 4번 시드인가에 따라 브랜드 인지도 격차는 매우 큽니다. 1번은 탑티어죠. 월드컵 축구로 치자면 매회 1번 시드를 배정받는 브라질과 독일에 해당합니다. 1번 시드의 단골인 하이네켄이 1873년에 출시되었는데요. 주류는 역사성과 전통성이 중요한 프로덕트입니다. 이제 막 축구협회가 설립된 국가가 150년 역사의 경쟁자를 제치고 탑 시드를 배정받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2022년 5월을 기준으로 인스타그램에 ‘#신상맥주’ 해시태그는 2만 개가 넘습니다. 곰표 맥주를 기점으로 콜라보 맥주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상맥주가 출시되죠. 소비자도 피로감을 호소합니다만 아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4번 시드에만 들어도 한 해 매출로는 쏠쏠하니까요.



관여도의 차이는 왜 날까

호텔을 구매하는 사람과 맥주를 구매하는 사람은 왜 다른 수준의 관여를 할까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다음 구매까지의 기간입니다. 호텔 예약은 빨라도 한 달 뒤, 늦으면 1년 뒤에나 다시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맥주는 매일 마시는 것도 어렵지 않죠. 1년에 한 번이라면 기회의 희소성이 크기 때문에 심사숙고하게 됩니다. 둘째, 실패에 대한 리스크입니다. 에어비앤비 서비스 초창기, 이용 고객이 예약 시 사진과 방문 시 실물이 달라 컴플레인하는 과정을 담은 에피소드가 종종 이슈가 됐었죠. 숙소 선택의 실패는 전체 여행 일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해외여행이라면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곳인데 그 한 번의 여정에서 최상의 경험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반면 맥주는 4캔 중 이미 50%의 안전한 선택지가 있기 때문에 나머지 50%는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다음에 이 맥주는 걸러야겠다”정도로 쿨하게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셋째, 경험의 시간입니다. 호텔은 체크인 시간 기준(15시~다음 날 11시)으로 최대 18시간을 머뭅니다. 예약 후 온라인 응대까지 포함하면 고객과 브랜드가 연결되는 시간이 매우 긴 서비스입니다. 반면 맥주 한 캔을 마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20분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경험하는 상품일수록 관여도가 높아지는 것이죠. 소비자 관여도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가격은 제외했습니다. 가격보다는 경험 시간이 더 밀접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지인이 에어팟 케이스를 사는 데에 3주 정도 탐색하더군요. 그가 구매한 케이스의 가격은 6,500원이었습니다. 한두 해는 쓸 물건이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인지시키고 어떻게 팔 것인가

호텔업에서 방을 잘 파는 방법은 좋은 후기를 쌓는 것입니다. 후기에 영향을 끼치는 서비스와 시설의 수준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시간을 두고 결과(후기)를 쌓아나가야 합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여행자는 OTA를 통해 호텔을 예약하고 후기가 구매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OTA서비스의 수수료율은 판매액의 12.5~15.5% 수준입니다. 매출의 최대 약 15%를 판매 수수료로 지불해야 하다 보니 호텔 운영사는 자체 홈페이지를 통한 판매 확대가 지상과제입니다. 자체 채널 판매율의 증가는 이익률의 증가도 견인합니다. 

직접 판매가 어려워서 생기는 서러움은 호텔이나 맥주나 매 한 가지입니다. 하지만 맥주는 법적으로 온라인 판매가 불가하고 탭룸 한 두 개 만드는 것으로는 전국에 포진한 5만 개의 편의점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맥주와 편의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 관계임을 인정하고 방법을 찾아야 하죠.

라거맥주는 여전히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습니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입 맥주 브랜드는 소비자 신뢰가 굳건하죠. 신상맥주 한 자리라도 차지할까 싶은데 소비자는 4번 시드의 맥주는 한 번 마시면 다시 찾지 않습니다. 새로움이라는 가치에 내어준 자리니까요. 새로움은 일회성이죠. 맥주는 시간의 세례가 매우 중요한 제품입니다. 기원전 4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일상과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있어 온 술이 맥주입니다. 맥주를 브랜딩해나 가는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장인정신과 역사성입니다. 미래의 시간을 미리 좀 당겨다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역사성은 우선 살아남은 뒤에 활용하기로 하고요. 소규모 브루어리의 경우는 양조장에서 직접 판매를 함으로써 수제, 장인정신의 가치를 전달합니다. 전국의 편의점에서 유통하는 대형 브랜드라면 온갖 제품으로 빽빽한 공간에 포스터 하나 붙이는 것 말고는 고객과 소통할 매체가 없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모든 술이 그렇지만 맥주는 지역성이 매우 중요한 술입니다. 칭따오나 삿포로와 같이 지역명이 맥주 브랜드인 경우도 많죠. 과거 맥주는 지역에서 생산된 원료와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지역마다 맛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20세기초 독일 뉘른베르크에 들어선 증기기관 열차가 첫 운행에서 싣고 간 것이 맥주 두 통이었다고 합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철도로 인해 지역 간 거리가 획기적으로 줄었고 맥주 교역이 늘어났습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 도시의 로컬 맥주가 집 앞 편의점까지 가까워졌습니다. 시드 2, 3 정도를 고려하는 소비자라면 내가 마시는 맥주가 어디서 온 것인지, 그곳은 어떤 곳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지역의 정체성을 담은 로컬리티와 오리지널리티, 시간의 세례를 극복할 맥주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6개월쯤 지나, 대 보고 나니 길고 짧은 줄 알았습니다. 호텔은 주로 길고 넓습니다. 맥주는 주로 짧고 협소하고요. 마케팅을 어떻게 팔 것인가, 브랜딩을 어떻게 기억하게 할 것인가로 정의한다면 호텔과 맥주를 팔 때, 무게 추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조금은 감이 옵니다. 고관여 상품이 브랜딩> 마케팅이었다면 저관여 상품은 마케팅> 브랜딩정도로 밸런스를 조정해 볼 수 있습니다. 전통 있는 맥주 브랜드가 될 시간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죠. 일단 편의점에 포스터 먼저 붙여놓고 탑 시드를 향해 묵묵히 가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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