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지인이 제주에 있는 한 농장에 관한 링크를 보내옵니다. 40년 간 사유지였던 정원을 일정 기간만 여는 팝업스토어 행사를 하니 꼭 한 번 가보라는 겁니다. (제주에 5년 간 살았지만)처음 들어보는 곳이라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링크를 따라 들어가니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네이버 예약은 7월 11일 월요일 저녁 6시부터입니다.”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다시 링크를 찾아 들어와 예약을 해야한다니... 대체 어떤 곳이길래 이렇게 자신감이 넘칠까 싶었습니다. 언감생심 제주 여행 계획도 없었지만 정해진 날짜에 네이버 예약 링크로 들어갔더니 모든 일정이 매진입니다. 제주 여행 계획도 없었지만 예약이 차서 못 간다고 하니 갑자기 이 농장을 꼭 가야만 할것 같습니다. 어느새 농장을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읽고 다음 예약은 언제 열리는지 확인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제주 부심은 어쩌고...
팝업스토어는 하루에서 최대 3개월 정도의 제한된 기간만 운영하는 브랜드 홍보 목적의 공간입니다. 높은 대관료와 행사가 종료되면 사라질 인테리어에 큰 비용을 사용하기 때문에 운영 첫날부터 일정 내내 얼마나 많은 고객을 불러들일 수 있는가가 관건입니다. 콘텐츠가 좋으면 사람들이 어떻게든 알아내서 찾아 오지만 상설로 운영되는 일반적인 가게와는 달리 팝업스토어는 좋은 공간 콘텐츠를 만들어 오가닉 바이럴만으로 단기간 많은 방문객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1차 방문 고객의 바이럴이 다음 고객을 불러들이는데 걸리는 리드타임이 아주 짧게 잡아도 5일 이상입니다. 주말에 다녀와서 친구에게 추천한다면, 그 친구도 이번 주말에나 가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요 상권의 대관료는 하루에 수백만 원에 이릅니다. 무슨 수를 쓰든 오픈 첫날부터 대기 줄을 세우지 못하면 실패한 행사가 된다는 업계의 속설(?)이 있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이 때문에 브랜드를 홍보하는 팝업스토어를 홍보하는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2022년 기괴한 팝업스토어 프로젝트의 기획과 PM을 맡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주맥주와 CJ비비고가 협업하여 압구정 로데오에서 한 달간 진행된 <도깨비만두바>입니다.
당시 한 달간의 팝업스토어 운영 기간 중 오픈 첫 4일(월화수목)에 한 해 사전 예약을 받았습니다. 이 기간 사람이 몰려 줄 서는 팝업스토어라는 바이럴이 만들어지면 다음 주부터는 소위 말하는 오픈 빨로 아름답게 마무리될수 있을 것이라 본 것입니다. 다행히 목표로 했던 일 방문객 대비 3.5배의 인원이 사전 예약을 신청을 받았습니다. 오픈 첫 날, 수 천명의 든든한 사전 예약자는 입장하는데 1시간 반, 메뉴를 주문하고 받기까지 30분을 더하면 총 2시간여의 기다림도 아랑곳 않았습니다. 그날 비가 왔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해피엔딩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전 예약자 방문이 종료된 다음 날, 방문객의 발길이 거짓말처럼 뚝 끊깁니다. 같은 공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날과 다른 풍경에 당황을 넘어 의아함마저 들었습니다.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서 부랴부랴 팝업스토어 바로 앞 길목에 나가 모객을 합니다. 어제까지만해도 2시간동안 웨이팅 할 정도로 열정 가득한 고객이 180도 변해버렸습니다. 정확히는 변화시키지 못한 고객을 맞닥뜨린 것입니다. 열에 여덟 분은 저를 보지도 않습니다. 한 분 정도만 가까스로 입장을 하시지만 5분도 채 되지 않아 퇴장합니다. 그 날 새벽께 집으로 돌아와 운영 변경안을 한 페이지에 정리하여 의사결정권자에게 보고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래는 그때의 문서에 있던 내용입니다.
코로나 이후 예약문화 일반화 -> 저녁 시간(특히나 불금이나 주말)에 예약 없이 유명 상권에 오지 않음
예약은 사전 기대감을 갖게 하여 핫플이라고 믿게 하며 1시간이라도 웨이팅 하는 동인이 되며 바이럴을 만들어 냄
예약은 귀한 저녁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전한 선택을 선호함.('맛없고 유명한 곳'이 '맛있는데 처음 보는 곳'보다 안전함)
기대감이 없이 온 워크인 고객은 구매, 인증, 만족감으로 이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음
따라서 운영 전일 예약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음
다음 날, 전면 예약제로 전환했고 다행스럽게도 다시 매진과 줄 서있는 고객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팝업스토어 자체는 공간 인테리어도 메뉴도 첫 날부터 바뀐 것이 없습니다. 같은 콘텐츠를 두고 전혀 다른 고객을 만든 것은 오로지 하나의 변수 '예약'이었습니다. 고객은 왜 불편한 절차에도 불구하고 예약을 하면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변했을까요? 예약제가 끝난 다음 날 부랴부랴 현장 모객을 하던 중, 모객에 실패한 고객 몇 분을 따라가 간단한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 혹시 가시려는 곳이 있으신가요?”
“네, 예약해 둔 곳이 있어요.”
저 역시도 지인과 모처럼의 약속을 잡으면서 식당 예약을 하지 않는 경우는 드뭅니다. 유동인구가 많은 유명 상권이라면 예약은 필수입니다. 불금 또는 주말의 귀한 시간에 식당을 찾아 헤매는 불상사는 일어나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이전, 예약제 방문은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운영했었습니다만 코로나 이후로는 예약제가 하나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가게 입장에서 예약 문화는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입니다. 하루의 방문객을 가늠하고 나아가 목표 고객을 사전에 확보한다면 식자재 폐기, 파트타임 인력 낭비 등의 고정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 절감된 비용으로 메뉴, 공간, 서비스에 재 투자가 일어나면 고객의 만족도는 올라가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좋은 예약제가 자리잡지 못한 이유는 고객이 예약으로 얻는 당장의 이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방문해도 입장할 수 있는 곳에 굳이 번거로운 예약의 과정을 추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객은 ‘약속한 일정이 바뀔 수 있는 상태'를 대비하려고 합니다. 약속이 변경되었을 때 방문 시간을 변경하는 수고를 들이거나 금전적 페널티를 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급부로 가게 입장에서는 노쇼로 인한 매출 하락, 예약 시간 변경으로 인한 대응 리소스 발생의 부담도 있습니다. 수요자의 니즈없이 공급자의 니즈만으로 문화가 만들어지기는 어렵습니다만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안전하고 싶은 고객의 니즈가 예약의 불편함을 넘어서면서 공급자의 니즈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팝업스토어 현장 모객 당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던졌던 멘트는 아래의 세 문장입니다.
이곳은 팝업스토어입니다.
OO와 OO가 함께 콜라보한 공간이에요.
OO을 경험할 수 있어요.
1단계는 공간 유형 전달입니다. 식사, 영화 관람과 같이 목적이 다른 사람은 필터링이 됩니다. 열에 여덟 명이었습니다. 2단계는 브랜드 인지 및 전달입니다. 브랜드 인지도가 높다면 다행이지만 모르거나 싫어하는 브랜드라면 또 한 번 걸러집니다. 열에 한 명이었습니다. 3단계는 콘텐츠의 종류 전달입니다. 예를 들어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사람이 반려동물 브랜드 팝업에 흥미를 느끼긴 어렵습니다. 잠깐 시간이 나고 브랜드를 알고 콘텐츠를 선호하는 사람은 입장을 고려합니다. 이들은 리플릿, 인스타 해시태그 검색, 공간 외관을 확인한 후에야 입장을 결정합니다. 그나마 들어왔던 1명이 5분 만에 퇴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장에서 운영 스텝에게 전달받은 정보로는 신뢰감 형성도 어려울뿐더러 기대감이 없습니다.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정도로 가게 문 턱을 넘은 것입니다. 목적지를 분명하게 가진 사람들에게 현장 홍보물을 통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저는 프로젝트 초기에 해당 입지 주변 유동인구가 18만 명/일이라는 데이터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부풀려진 숫자를 가정하고도)최대한 보수적으로 현장 모객수를 추정했으나 그마저도 말도 안 되게 빗나갔습니다. 당시 현장 상황을 생각하면 유동인구 18만명은 거의 무용지물입니다. 고객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지인 또는 온라인을 통해 목적지의 기본 정보, 평판 심지어 주문할 메뉴까지 모두 결정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고객에게 ‘예약'이라는 과정을 슬쩍 밀어 넣으면 고객의 마음은 180도 돌변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실시한 '선택'에 관한 연구가 있습니다. 이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몇 장의 그림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선호도에 따라 순위를 매기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림을 두 개씩 보여주며 둘 중 어느 그림을 자신의 집에 걸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그림의 순위를 다시 매기게 했습니다. 자기 집에 걸고 싶다고 선택했던 그림의 순위는 처음보다 올라갔고, 집에 걸지 않겠다고 말한 그림의 순위는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단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는 결과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입니다.
고객에게는 '맛없고 유명한 곳'이 '맛있는데 처음 보는 곳'보다 안전합니다. 유명한 곳이라면 콘텐츠가 조금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만족도는 내려가지 않습니다. 예약은 고객으로 하여금 실패하지 않을 안전감과 성공적인 시간일 것이라는 기대감 사이에 머물 수 있도록 합니다. 이렇게 예약에 성공한 고객은 긍정주의자가 되어 나타납니다. 방문한 업장에 손님이 없어도 오늘만 유독 사람이 없어서 좋을 수 있고 낡고 기우뚱한 테이블을 보며 힙하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도깨비만두바>를 다시 열었을 때 지난번 방문한 고객이 다시 찾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제주의 농장은 올 가을을 마지막으로 5년쯤 뒤에 다시 열린다고 합니다. 저는 5년 뒤에 꼭 다시 방문할 생각입니다. 물론 개인적 선호가 작동된 비교입니다. 예약이 어떤 공간이든 적용가능한 효과적인 모객 수단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콘텐츠를 비롯하여 재 방문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콘텐츠의 실체와 고객 기대감 사이의 갭이 ‘0’에 가까울수록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약은 초기 모객의 모멘텀과 긍정 인지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장기적인 선호와 재방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예약으로 찾아 준 고객의 피드백을 듣고 시장에 맞도록 제품/서비스를 조정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예약제 운영의 효과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전 고객 수 확인을 통한 예측가능한 업장 운영->고정비 절감->재 투자->콘텐츠 퀄리티 상승->고객만족도 증가 =>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긍정 인지 고객 필터링->업장 방문->높은 고객 만족도->긍정 후기 확산 => 많은 사람이 방문하도록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공간 기획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 많은 사람이 방문하도록 하는 것. 예약은 아주 시의성 높은 문화 현상입니다. 세심하게 설계한다면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