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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코 Sep 24. 2023

동굴과 마트

영업용 브로셔와 온라인 자사몰을 개선하고 싶다며 찾아온 고객이 있었습니다. 브랜딩이 ‘디자인 리뉴얼’에 머물러 있는 고객이 많습니다. 창업 1년 차의 1인 기입인 <샤인(가칭)>은 지역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을 판매하는 소규모 와인 브랜드를 운영하며 첫 제품 <그라치에(가칭)>를 3개월 전 출시했습니다. 연배가 저보다 한참 위인 대표님이 테이블에 앉기가 무섭게 A4용지 출력물 하나를 꺼내서는 펄럭이며 눈 앞에 내놓습니다. 디자인 업체에서 뽑아준 브로셔 시안인데 카피와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펼쳐보니 대표님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브로셔가 심미적으로 뛰어난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니 차치하고 네이밍, 문구, 사진이미지가 모두 제 각각으로 따로 놀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마음을 담았습니다'라는 카피도 제품명, 브랜드 스토리, 판매처, 원물 등 제품의 USP user selling point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대표님은 상기된 톤이 가라앉지 않은 채 말씀을 이어갑니다. <그라치에>는 현재 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의 관광명소인 광명동굴에 납품을 하고 있으며 생협, 지역 기관 선물용 등 판로를 더 뚫어보고자 영업을 하려는데 그때 가져갈 브로셔와 영업 후에 그들이 검색했을 때 회사가 좀 있어 보였으면 좋겠다는 다소 모호하지만 솔직한 요청을 하십니다. 대표님이 정의한 문제, ‘브로셔의 카피와 디자인이 별로다’와 솔루션, ‘브로셔, 추가로 영업 효과를 높이기 위한 홈페이지 제작'은 파악을 했고, 이제 제가 질문을 던질 차례입니다. 

“대표님, 창업한 지 6개월밖에 안되었다고 하셨는데 이전에는 혹시 어떤 일을 하셨나요?” 

대표님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집니다. 연배가 높은 분들은 무용담을 좋아하십니다. “(한 10분 간 꽤 길게 말씀하셨지만 요약하면 한 문장으로)빵을 기관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가 지금은 카페와 매점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러셨군요. 근데 어쩌다 업종이 전혀 다른 와인 사업을 하시게 되었어요?”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3년 전인가…누님 가족이 광명에 놀러와서 구경도 시켜드릴 겸 광명동굴에 놀러갔어요. 잠깐 설명드리면 광명에는 갈 데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몇년 전에 지자체에서 광명동굴을 열었는데 대박이 났어요. 연간 100만명이나 여길 다녀가거든요. (중략) 다 둘러보고 나오면서 기념품샵에 들렀어요. 거기도 사람이 북적이더라고요. <광명와인동굴>이라고해서 와인 십여가지를 팔아요. 근데 살펴보니까 광명동굴인데 광명에서 만든 와인은 없는 거에요. 누님이 장난처럼 그러더라구요. “와인 만들어서 한 번 팔아봐” 몇 일이 지나도 누님이 쿡 찌른 그 말이 계속 머리에 남는거에요. 방문객도 많고 마침 광명이 특산품도 마땅히 없어서 다른 지역 와인을 팔고 있으니까 광명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승산이 있겠다 싶었어요. 내가 와인을 전혀 모르니까 일단 OEM할 곳 찾아서 제품 생산을 맡겼어요. 그리고 광명동굴 담당자를 찾아가서 여기서 우리 꺼 좀 팔자고했죠. 시작하고 입점하는데 꼬박 3년 걸렸네요.” 

“실례가 안된다면, 혹시 현재 매출이 어디서 얼마나 나오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직 초기라 판매량이 많지는 않아요. 지금 광명동굴에서 판매한지 3개월 정도 되었는데 매출은 거의다 거기서 나온다고 보면 돼요. 그거 말고는 OO백화점 지역 특산품 매대에도 제품이 들어가는데 하루에 한 병 팔리는 정도에요. 그래서 판로를 좀 더 확장하려는 거에요. 기관이나 지역 마트도 찾아가서 납품 제안을 좀 하려고요.” 

“근데 사장님, 왜 판로를 확대하려는 건가요?” 아침에는 해가 어느 쪽에서 뜨나요같은 질문에 대표님이 대답을 머뭇거리시길래 제가 확인차 다시 물었습니다. 

“매출을 높이거나 수익을 더 확보하려는거 맞나요?”

대표님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럼, 정리하면 광명동굴외에 신규 판매 채널을 뚫어서 매출, 수익을 높이려는 거네요. 그렇다면 기존 채널(광명동굴)의 어떤 한계 때문에 신규 채널 확대에 투자하려는 건가요?”

“...” 대표님이 생각에 잠기셨습니다. 

첫 미팅이 있은 다음 주 함께 광명동굴을 찾았습니다. 과연 매출이 더이상 확장될 여지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와인기념품샵에서 일하는 스텝을 찾아가 대표님과 함께 마주 선 자리에서 질문 몇 가지를 통해 알아낸 사실은, 광명동굴을 찾는 사람의 약 30%는 와인을 구매한다는 것입니다. 광명동굴을 방문하여 와인을 구매하는 연간 30만명의 사람들 중 10%만 설득해도 대표님이 다른 판로를 확장해서 얻고자 하는 매출의 수 배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제한의 기술

몇년 전 제주를 휩쓸고 간 태풍이 있습니다. ‘제주마음샌드'입니다. 여행객들의 주머니를 그야말로 태풍처럼 휩쓸고 갔습니다. 초창기 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잘 팔리고 있는걸 보면 아무래도 감귤초콜릿처럼 제주에 가면 꼭 사야하는 기념품이 될 가능성도 보입니다. 제주마음샌드는 우도 땅콩 크림이 들어간 아기 손바닥만한 크기의 디저트로 SPC의 파리바케트에서 내놓은 제주 한정 상품으로 제주 공항의 파리바게트에서만 살수 있습니다. 제주를 찾는 여행객은 공항에 내리면 렌터카를 타러 가기 위해 발걸음이 바빠집니다. 여행객은 공항 입구에서 보이는 야자수나 ‘Hello Jeju’라 적힌 사인물 앞에서 사진 한 장 찍는 정도의 시간만 허락할 뿐 얼른 렌터카를 타고 제주 여행을 시작하고 싶어합니다. 그런 여행객들이 제주의 입국장에 위치한 파리바게트에서 마음샌드를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대기합니다. 제주마음샌드는 제주 공항에 있는 파리바게트 매장 세 곳에서만 하루에 6만 2천 개가 판매됩니다. 지루한 대기 시간을 버티면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루 한정 수량만 판매하기 때문에 재고가 소진되면 발걸음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입국할 때 실패한 고객이 제주를 떠나는 출국장에서 다시 도전하기 때문에 출국장 파리바게트도 붐빕니다.  

여행을 가면 그 지역만의 특산품이 있습니다. 퀄리티가 좋은 상품도 더러 있지만 조악하기 이를데 없는 상품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특산품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기능을 하는 기성품과 다른 대우를 받습니다. 지역 특산품의 가치는 두 가지를 ‘제한'함으로써 발생합니다. 첫째는 원물 제한입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해당 지역에서 생산 또는 수확되는 원물을 사용합니다. 가까운 곳에서 나고 자란 재료를 쓰기 때문에 더욱 신선하고 맛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가치가 발생합니다. 제주로  여행가서 가평 잣 막걸리를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제주마음샌드는 우도에서 수확한 땅콩을 사용하여 만든 디저트입니다. 두번째는 구매범위 제한입니다. 지역 특산품은 지역 또는 해당 관광지에서만 살수 있을 때 다시 언제 올지 모른다는 고객의 심리를 자극합니다. 우리 동네 빵집에서도 구할 수 있는 빵을 제주에서 굳이 사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주마음샌드는 제주에서만 살수 있습니다. 원물과 구매 범위를 제한한다고 해도 불티나게 팔리지는 않습니다. 제주마음샌드는 추가로 한 가지를 더 제한함으로써 지역 특산품이 가지는 ‘제한'적 가치를 극대화했습니다. 바로 수량 제한입니다. 제주마음샌드를 무제한으로 살수 있었다면 이른 시간부터 웨이팅을 하거나 바이럴이 폭발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주마음샌드가 맛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구매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고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팔릴지 모를 제품을 한정 수량만 판매하기로 하는 것은 세일즈가 아니라 마케팅 목적성에 좀 더 무게 중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과거에는 불가피하게 원물과 구매 범위가 제한되었으나 오늘날은 물류가 발달하고 지역을 여행하는 횟수도 늘어나다보니(또 올수 있으니) 지역 특산품의 가치가 예전만 못합니다. 따라서 제주마음샌드는 수량 제한을 통해 지역 특산품이 가지는 ‘제한'의 가치를 상기시키고 극대화함으로써 품절대란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효했던 전략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대표님, 제주 공항의 연간 이용객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아시나요? 1년에 3천만명, 하루에는 약 8만 2천명이 공항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제주를 찾는 사람의 97%가 공항을 거쳐갑니다. 전국의 모든 상권을 통틀어 이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길목'은 없습니다. 여행객은 공항만 빠져나가면 서울보다 3배가 큰 제주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주요 관광지 몇 곳과 맛집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모여있는 곳을 찾기가 어려워져요. 제주가 워낙 크다보니 여행객은 동쪽, 서쪽으로 나뉘어 흩어집니다. 즉, 동쪽에 있는 가게는 (전체 여행객의 반인)서쪽 여행객을 못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 공항을 나서는 순간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맛집과 디저트 가게가 즐비합니다. 경쟁을 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근데 공항에서는 SPC가 돈을 들이지 않아도 제주 입도객의 97%가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공항 내부는 제주의 핫플레이스와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주에 파리바게트가 약 50개 있는데 공항의 3개 지점에서만 마음샌드를 판 이유는 바로, 제주를 찾는 모든 여행객의 길목에 있고 경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 아닐까해요.” 

광명동굴은 <샤인>의 대표님이 따로 홍보/영업하지 않아도 연간 100만명을 모객해줍니다. 반면 지역 마트는 그 수에 훨씬 못 미칠 것입니다. 또한 마트에는 경쟁 제품이 수두룩 합니다. 와인 뿐아니라 모든 주류와 경쟁해야 합니다. 하지만 광명동굴은 십여 종의 와인 제품과만 경쟁하면 됩니다. 더군다나 지역특산품의 기본 요건인 원물을 제한한 제품이 없다면 <그라치에>가 선택될 확률은 더 높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셔야할 이유 vs. 기념할 이유

관광지의 여행객과 마트의 고객은 같은 사람이라도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평소 이성적인 구매를 하는 사람도 여행지에서는 충동적 구매를 합니다. 관광지에서 기념품을 사는 것은 식사 후 아메리카노처럼 흔한 일입니다. 따라서 관광지의 와인과 마트의 와인은 같은 와인인데 전혀 다른 와인이 됩니다.  마트의 와인은 마셔야할 이유가 있어야 구매하지만 관광지는 기념할 이유가 있어 구매합니다. <그라치에>는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 와인회사가 만든 3개월된 신상 제품입니다. 와인은 빈티지가 중요하고 주류 시장은 회사의 역사가 속된 말로 ‘깡패’인 시장입니다. 핸드폰 만드는 회사는 길어야 20년이지만 술 회사는 100년이 넘는 곳이 수두룩 빽빽합니다. 기원전에도 와인을 마셨으니 오죽할까요. 마트에 있는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 만가지 와인과 경쟁해서 3개월차에 접어든 OEM생산 제품, <그라치에>를 ‘마셔야할 이유’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수 만병의 제품과 ‘와인’으로써의 경쟁을 하는 것보다 십여 병의 제품과 ‘기념품'으로써 경쟁을 하는 것이 더욱 확률 높은 게임입니다. 

광명동굴은 1912년부터 금, 은, 동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광물을 채취하는 광산입니다. 1972년 폐광하여 40년간 잠겨있다가 2012년, 광명동굴 100년을 기념하며 대중에 공개되었습니다. 재밌는 스토리가 많지만 차치하고, 광명동굴을 방문한 관광객은 60-90분간 광명동굴의 서늘한 온도, 맑은 지하암반수의 습기, 동굴벽 곳곳의 생생한 드릴 자국을 보며 당시 광부의 노고와 삶을 간접 체험합니다. 진한 체험이 끝나고 퇴장 직전 만나는 곳이 와인동굴이라 이름 붙인 와인 기념품 샵입니다. 이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진 와인 약 10여 종이 각 지역명을 달고 판매되고 있습니다. 와인 매대 앞에 선 고객이 가장 구매할 확률이 높은 와인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브로셔와 홈페이지 디자인을 손 보는 대신 와인 이름과 라벨만 바꾸기로 했습니다. <골드러시 1912>라는 이름을 달아보기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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