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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싸라기 Dec 03. 2023

니체와 나

아포리즘의 이해

니체의 글과 그의 일생을 보면 놀랍기도 하면서 의아함을 느낀다. 그의 일생을 보면 한마디로 우울함의 극치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 아픈 일생을 살아왔음을 알 수가 있다. 가족력으로 인한 부모 형제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자신도 뇌질환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외로움과 우울증으로 힘겨운 인생을 살아왔다. 그나마 일생에 한번 있는 구애마저도 받아들여지지가 않고 쓸쓸히 혼자가 된 삶을 살았다. 그가 만일 구애에 성공해서 아내에게 사랑을 받고 행복한 일생을 살았다면 그의 일생은 달라졌을까? 지금 우리가 읽는 그의 글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실연을 당하고 쓰여진 작품이 '짜라 투스 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이쯤에서 쓰여 졌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증거이다. 모든 것이 100% 닮았다고 할 순 없으나 거의 흡사하게 나의 일생과도 비슷한 점이 많다. 내가 존경하고 같은 철학적 동질감을 느끼는 인물의 일생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끼면서 뭔지 모를 놀라움과 쓸쓸함이 마음속에 공존한다.

한동안 글도 책도 가까이하지 못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실망과 자책과 후회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고 나아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었다. 무능하고 왜소하며 점점 작아져가는 나이 많고 쓸모없는, 지구에 사는 작은 점에 불과한 중년 남자... 가족도 형제도 아무도 찾지 않는... 게다가 반겨주는 곳도 반겨주는 사람도 없는 자투리 같은 인생. 그랬다.... 나는 나 자신과 사이가 안 좋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좋은 말과 상냥한 미소를 기대할 수 없기에 자꾸만 조용하고 한적한 곳만 찾으며 겉돌아 다녔다. 니체 역시 외로웠으며 잦은 투병으로 힘든 인생을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반대로 외쳤다.

심지어 에고이스트 즉, 이기주의는 야만적이라고까지 말하며 외로움과 고독은 위험하고 세상으로 사람이 많은 곳으로 나가라고 나의 등을 떠민다. 며칠 동안 니체의 그런 주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잠들기 전까지는 왜 그렇게 말했는지 생각했다. 자신은 그토록 힘들었으면서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라고 말하는 게 이해가 안 갔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무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사고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피가 나고 고름이 흐르는 내 영혼을 위해서는 상처가 낫기를 바라면서 또는 이런 처참한 몰골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싫어서라도 자신만의 동굴이나 안전한 집구석이라도 당분간 숨어서 자신을 끌어안고 통곡이라도 하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고 비록 그렇게 살다가 인생이 끝난다 할지라도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아프면서도 대중 앞에서 아닌 척 웃으며 춤을 추며 행복이라는 가면을 쓰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자기 경멸이다. 세상에는 노력해도 안되는 일이 많다. 특히 자신과 싸움은 쉽지 않다.

니체에 대해서 한 가지 언급하자면...

완벽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것이 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하다 보면 니체는 무신론자라고 나온다. 아마도 그가 한 말이 그의 대표적인 명언이자 그를 대표하는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지금 현재로서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는 표면적인 직역으로 이해하기에 나온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본다. 중세 시대도 아니고 입에 올리기 까다로운 신이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말을 하면 악마고 무신론자인가?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그 역시 어릴 적 신동이라 불리며 어린 나이에 성경 구절을 암기하여 가족들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목회자 집안의 아들이라고 모두 싸잡아서 한 방향으로 좋게 해석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모든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아포리즘이라는 경계에서 바라본다면 여러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당시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비추어서 해석해야 편향적이지 않은 해석이 나온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신이 죽었다고 말한 것은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극히 자극적이며 짧지만 강력하게 전달되는 아포리즘의 많은 해석 중 하나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신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산업혁명 속에서 피어난 다른 종류의 인간의 안식이 현실적인 인간의 삶을 완성한다고 본 것이다. 인간과 신만이 존재한 세상에서 새로운 혁명의 등장으로 인해서 세상의 저울이 기울어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두 번째는 단어 자체가 주는 웃지 못할 명료함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이듯이, 정말로 신을 부정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면 굳이 신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을까? 게 다 가 신이라고 말한 이상 아이러니하게도 신은 존재한다는 역설적 의미이며, 강력한 존재인 신을 인간처럼 죽는다고 표현함으로써 변해버린 인간의 마음 중심과 삶의 상태를 비틀어서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라 생각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점이며 시각이다.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부분은 어떤 아포리즘을 대할 때 절대로 고집에 가까운 형태로 대중들이 수긍할 만한 적당한 선으로 타협하여 선을 긋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니체는 말했다.

자신의 모든 글을 읽고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여러 가지로 해석도 해보고 고민도 해보고 많은 시간을 들여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고... 그리고 우리에게 당부했다. 글은 '피로 써라'라고... 그만큼 고뇌하고 한 글자 한 글자에 영혼을 담아서 쓰라는 얘기리라 생각한다.

나는 사랑의 결핍이 심하다. 아니 사랑을 잃어서 글을 쓴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글쓰기에 매달린다.

기쁜 일이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시리다. 늘 마음에 얼음송곳이 박혀있다. 글 쓰는 동기가 행복이나 환희로부터 시작됨이 아닌 외로움과 고독이며 쓸쓸함과 고통스러움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슬프다. 글 쓰는 작업은 나의 몸부림이자, 살아있음의 증거이고 마지막 발악이다. 많은 예술가들이나 철학자들의 일생이 그토록 쓸쓸하고 힘겨움은 숙명인 것일까? 그래서 그렇기에 수많은 명작이 탄생한 것일까? 그런 생각에 여전히 씁쓸하다.

모처럼 글을 쓰며 장편 소설을 구상 중이다. 소재 자체가 이미 나와버린 시리즈물과 비슷해서 의기소침 해졌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고민 중이다.

모쪼록 존경하는 니체가 편안한 안식을 취하고 있기를 바라며, 나 역시도 언제 끝날지 모를 자기혐오와 우울증을 떨쳐낼 날이 오길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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