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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변 산책로가 있는 한적한 숙소

by 글싸라기

4월의 끝자락 새벽 5시경.

봄이라는 계절이 무색하게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는 것은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대부분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에 나는 또다시 커다란 쇼핑백에 옷가지와 이불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층간 소음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몇 달 동안의 고단했던 날들은 나의 타고난 천성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 나만의 책임이라고 인정하기엔 불쑥불쑥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 밖의 행동과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은커녕, 공감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의 알 수 없는 내면까지 헤아리기는 싫었다. 그렇게 속 좁은 마음으로 마지막 짐을 가지고 내려오며 공동현관에 달린 오래된 유리문을 억지로 세게 닫았다. 유리문이 깨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크게 울렸고 그렇게 유치하고 소극적인 마지막 복수를 하고 숙소 건물을 빠져나왔다. 모두가 잠드는 시간대에 생활 소음이라고 우기며 다른 사람들의 숙면을 방해했던 위층의 행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자위하며 위층 창문을 바라보니 불이 켜져 있었다. 윗집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복수의 완성을 느끼게 되자 나도 모르게 얼굴에 못돼먹은 미소가 번졌다.

이제 다시 내려가자.”

5개월 전. 마음에 커다란 돌멩이를 가지고 올라왔던 350km의 먼 거리를 다시 내려가야 한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이곳을 막상 떠나려고 하니 또다시 울컥했다. 담뱃불이 필터까지 타들어 갔지만 끄지 않고 한참을 들고서 숙소 주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바라보았다. 5개월 동안 지척에 그녀가 있었지만 못 갔다. 아니 안 갔다. 아직도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아니 경멸한다. 그녀를 통해서 나 자신의 몰골을 발견했고 그 진실을 마주하면서 끝없는 고통 속에서 무기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고통과 무기력함의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고, 스스로 인정하고 그것을 끌어안고 이겨내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스스로에게 단죄하고 형벌을 감내하는 동안 나는 온통 피 범벅이 된 스스로에게 또다시 난도질하며 서있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유일한 축복인 글쓰기로 참회하다가 영면하길 소원한다.


작년부터 쓰다가 멈춘 후 고심하며 미뤄오던 소설이 있다. 그 대상과 주제를 다루기엔 개인적으로 힘든 부분이기에 아직 미완성으로 미루고 있다. 이제는 다시 써야겠다. 미안한 마음으로 그리고 그리운 마음으로. 어스름하게 피어나는 해를 뒤로하고 고속도로에 들어서며 길고도 짧았던 그리고 유난했던 겨울날의 에피소드를 조금씩 지워가며 조그만 차는 다시 그녀가 사는 집과 멀어져 갔다. 지루한 운행을 마치고 도착한 마을은 한적한 마을이었다. 새로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단출한 이삿짐을 대충 정리했다. 다행히 이전 숙소보다 작긴 했지만 깔끔했다. 작은 원룸 위에 달린 복층을 보자마자 여기다 싶었다. 천정이 사선으로 이루어져서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머리를 부딪히는 낮고 불편한 구조지만 조그마한 창이 달려있었고 조용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독서와 글쓰기에는 최적화된 곳이란 느낌이 들었다. 내 집도 아니고 숙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방이 생긴 것처럼 책상으로 사용하는 밥상을 창문 앞에 놓고 책과 이부자리 위치를 배치하면서 잠시 싱글벙글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고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서 숙소를 나섰다. 동네에 사람도 별로 없었고 한적하니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그동안 살아오면서 사람에 치이고 사람에 진절머리가 났나 보다. 골목을 돌아서니 이면 도로를 이어주는 조그만 다리가 보였다. 혹시나 하고 가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붉은 아스팔트가 깔린 잘 정리된 수변 산책로가 있었다. 쉬어가라고 드문드문 벤치도 놓여 있었다. 식사 후 소화도 시킬 겸 산책하거나 혼자서 조용히 명상하기도 좋은, 그야말로 힐링하기 좋은 곳이었다. 낯선 곳에서 이렇게 멋진 산책로를 만나게 되다니 게다가 예쁜 창이 달려있는 다락방 같은 숙소까지. 이곳에 도착한지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로를 걸어갔다. 그러면서 첫 번째 떠오르는 생각은 밀려있는 글을 다시 쓰고 싶어졌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리고 기분 좋은 긴장감이 다시 생겨났다. 입가에 미소도 지어졌다. 산책로를 걸어가다 첫 번째 마주친 벤치에 슬며시 엉덩이를 디밀었다. 바람은 적당했지만 햇살은 생각보다 따가웠다. 그래도 흡족했다. 이게 웬 호사인가 하고 생각할 즈음,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듯이 반가운 모습들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더듬이로 무언가를 열심히 찾으며 헤드뱅잉을 하는 개미와, 거미줄을 치기 적당한 곳을 찾기 위해서 느릿느릿 벤치 다리 위로 기어오르는 처음 보는 요상하게 생긴 거미, 어린이 기침 가래에 효과가 좋은 시럽 형태의 약병에 그려진 것 같은 짙은 노란색의 앙증맞은 들꽃, 빼빼로 끝에 초코가 뭉친 것 같은 얇고 긴 꼬리를 가진 실잠자리, 물고기를 잡으려다 놓치고 첨벙거리다가 자신을 두고 내뺀 친구를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뒤쫓아 가는 오리의 모습. 너무나 반가운 자연의 친구들과 한동안 잊고 지냈던 해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꼬마가 된 나는 한참 동안을 이 친구들과 미소로 대화하며 이들을 눈과 가슴속에 담았다. 연고도 없는 낯선 먼 곳까지 와서 느닷없는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것이 얼마 만인가 나도 모르게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연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번지는 일이.

글을 쓰고 싶은 조급한 마음이 들자마자 산책로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예쁘고 아늑한 다락방 같은 복층 방을 향해서 걸어가는 내 손에는 수변 주위에서 반갑다고 손을 흔들던 갈대가 들려있었다. 숙소에 다다를 즈음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무심코 쳐다본 바지 끝단에 개미 친구가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개미는 여전히 더듬이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숙소 근처에 쪽파와 고추가 심어져있는 텃밭으로 가서 개미가 다치지 않게 바짓단을 살살 털어냈다. 개미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잘 가 개미야. 내일 또 보자.”

예쁜 수변 산책로가 있는 이 숙소에서 난 행복할 것 같다. 적어도 얼마 동안은 감사할 것 같다. 복층 창문에 얹어놓은 향초에 불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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