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온 지도 어느덧 100일이 다 되어간다.
기다리던 비는 오지 않고 햇살이 무척 성이나 있었다. 고개를 들기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평소보다 무엇인가 극으로 치달으면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본다. 나 역시 이런 날씨를 맞이하며 혹시라도 내가 무엇인가 잘못해서 하늘이 노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하며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어본다. 이런저런 잡스러운 생각과 두려움을 안은 채, 날씨를 핑계로 한동안 외면했던 수변 산책로를 걸었다. 사람들의 말대로 마른장마 때문에 비도 오지 않았는데 그사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히 자라나 있었다. 걷기에 좋은 몇 달 전과는 사뭇 다르게 발걸음에는 여유가 없었다.
목덜미부터 등짝까지 바늘로 찌르는 듯한 열기가 혀를 내두르게 했다. 그렇게 산책이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의 방정맞은 걸음 아니, 그보다는 어서 이곳을 빨리 벗어나려는 생각으로 가득한 채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무성히 자란 풀숲으로는 가지도 않았는데 지래 놀란 무언가가 폭죽을 터뜨린 것 같은 몸놀림으로 도망을 가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팝콘이 생각났다. 풀숲과 팝콘이라. 자신이 생각해도 전혀 연관성이 없음을 알면서도 발걸음을 멈춘 자리에서 팝콘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어릴 적, 큼지막한 냄비에 소금과 버터를 한 숟가락 툭 털어놓은 후 옥수수 알갱이를 양껏 몇 줌 넣어놓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통통 거리며 조그만 옥수수 알갱이는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마치 아카시아 꽃망울처럼 곱게 피어났다.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가늠해 볼 요량으로 유리로 된 냄비 뚜껑을 덮어놓고 무릎을 모은 채 쪼그리고 뚫어져라 쳐다보다, 향긋한 버터 향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뚜껑을 갑자기 열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맨 아래에서 터져버린 팝콘. 그 때문에 사방팔방으로 미친 듯이 팝콘이 튀어 오르던 그 장면이 지금 풀숲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딱 맞아 떨어졌다고 느낀 것이었다,
쪼그려 앉아 자세히 살펴보니 그 주인공은 바로 메뚜기와 방아깨비 새끼들이었다. 손톱보다 작은 생명체들이 어쩌면 저렇게 성체가 가지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놀라움과 흐뭇함에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덧 내 몸을 괴롭히던 강렬하고도 하얗게 쏟아지던 여름 햇살은 더 이상 괘념치 않게 되었고, 오히려 오래전 꼬마였던 그 시간 속으로 나를 안내했다. 허벅지 안쪽과 종아리가 맞붙은 곳에서는 미끈거리며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듬이와 날개 그리고 앙증맞은 뒷다리. 초록색과 연두색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몸뚱이는 그야말로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반가운 마음에 손길을 뻗어보았지만 그 작은 아이들의 민첩성은 정말로 대단했다. 나의 반가운 몸짓에 대해서 보여준 날렵한 그 아이들의 민첩성은 그저 낯선 침략자의 못된 획책이나 심술궂은 방해꾼으로 밖에 느끼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서운하게도 그 아이들은 다시 풀숲으로 숨어버렸다. 나는 서운함과 쓸쓸함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뻑 젖은 반팔 티셔츠와 종아리에서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기분이 찝찝했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시원한 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마른장 마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강물과 초록을 무성하게 뽐내며 꼬마들의 놀이터가 되어준 풀숲을 뒤로하고 걸어오며 생각했다. 이제는 마무리를 해야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너무 놀고먹었다, 안톤 체홉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서 쓰게 된 소설. 세 가지 인간성에 대해서 조명하여 인간 내면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단편소설 손거울을 든 여자라는 소설. 그리고 한 남자의 인생을 통해서 지난 한국의 시대상과 비뚤어질 수밖에 없었던 한 시대를 살아온 부모 세대와 자식세대 간의 갈등을 그린 땅콩 배추라는 소설. 큰 줄거리는 그려놓은 상태지만 개인적인 핑계로 오랜 시간 머릿속에서만 전전긍긍해온 이야기들이 독자분들에게 어떤 의미로 해석되고 평가받을지 궁금하다. 공동현관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가는 지금 땀 때문에 끈끈해진 손에는 팝콘 한 봉지가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