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화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절.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자석 같은 끌림으로 인연을 이어가던 두 사람에게 꿈 같은 시간이 선물처럼 주어졌다. 찬혁은 찬혁대로 은미는 은미대로, 서로에게 마음을 의지한 채 사랑에 대한 기대로 벅찬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찬혁은 처음으로 느껴본 행복한 순간을 놓치기 싫었고, 은미는 이혼 후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새로운 기대와 행복한 시간을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부분 시간은 문자로 시작하여 전화통화로 이어지는 사랑의 대화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른 채 새벽까지 이어졌고, 주말에는 은미가 찬혁이 살고 있는 인천으로 와서 일요일까지 함께 지내며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세상을 모두 얻은 듯 벅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 몇 시쯤 도착하는데?”
금요일 오전부터 찬혁은 느림보가 되버린 시간을 재촉하며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략 오후 네시쯤?”
“내일 먹고 싶은 거 뭐있어?
“파스타! 자기가 해주는 파스타가 맛있어.”
“그리고 또.”
“배 터져 죽는다. 나 양 작은 거 알잖아.”
“홍합탕 좋아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손질이 귀찮아서 그렇지 안 어려워.”
“무슨 남자가 요리를 그렇게 잘해?”
“그것뿐만 아니야. 감바스, 돈가스카레 그리고 미역국, 북엇국, 짜글이 등등 어지간한 요리는 다해. 모르면 인터넷 뒤져서 하면 돼.”
“정말 대단해.”
“사실 요리라는 것이 별거 아니야. 볶음만 알면 절반은 된 거야. 거기에 물만 더 부으면 찌개고, 또 물을 더 부으면 국이야.”
“오호, 그렇게 쉬운 걸 난 왜 못할까?”
“하하하 괜찮아. 내가 해주면 되지.”
“오 정말? 나 밥 해주느라 힘들지 않아?”
“내가 해줄 수 있어서 행복한데 무슨 소리야.”
“너무 감동이다. 고마워.”
“맛있게만 먹어주면 돼.”
“내일도 기대되는걸.”
“오케이 얼마든지! 대신, 먹기 전에 한 가지는 빼놓지 말라구.”
“응? 그게 뭔데.”
“어 정말 모르는 거야?”
은미는 눈치를 챘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응 정말 모르겠어. 뭘까?”
“자기 얌체다.”
“호호호 알았어, 알았어.”
은미는 항상, 식사 전에 자신을 위해서 요리를 열심히 준비한 찬혁에게 보답의 의미로 가벼운 입맞춤을 하곤 했는데, 찬혁에게 그것은 커다란 기쁨이었고 두 사람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식전행사였다.
두 사람은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그 대화내용을 누군가 들어 본다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이었으나, 두 사람에게만큼은 이런 대화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즐거웠다. 사람이 많은 버스 안에서도 문자를 주고받느라 출퇴근길의 스트레스와 고단함은 마취가 되어버린 듯했다. 찬혁은 이런 마취제가 먹는 약으로 세상에 출시된다면 아마도 노벨 의학상이라도 수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 제약회사는 돈방석에 앉을 것이 분명하다는 상상까지 했다. 두 사람은 퇴근 후에도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만 제외하고는 휴대폰을 붙들고 살았다. 알콩달콩한 둘만의 대화는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아쉬움을 뒤로한 채, 꿈속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통화가 끝났다. 하루도 빠짐없이..
어느날 통화를 마친 찬혁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잠을 청하기 위해서 눈을 감았을때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띠리링~]
순간 찬혁은 은미의 전화라고 생각하고 반사적으로 상채만 일으킨 채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젠장 기명이었다.
“뭐야, 너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이 사람이! 이 사람이 말이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뭔 소리야. 너 또 이 시간까지 술 퍼먹은 거냐?”
전화기 속 주변에는 왁자지껄한 소리와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이.. 넌 도대체 누구랑 통화하길래, 몇 시간 동안 통화 중이냐고.”
“왜, 뭐?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은.. 한잔 하자고 전화했는데 계속 통화 중이니까 하는 말이지. 제수씨냐?”
“니가 알바 아니고.”
“아이고 이런, 늦바람이 무섭다고.. 그렇게 좋냐?”
“야야,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할 거면 끊어. 나 자야 해.”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정말 안 되겠네. 여자 생기니까 이젠 친구를 나 몰라라 하네.”
“아 좀! 취했으면 빨리 들어가서 자라고.”
“그래그래, 좌우당간 이 엉아가 보기는 참 좋다. 하하하. 그렇게만 해 알았지? 나도 양복 한 벌 얻어 입어야겠다.”
“지랄도 다채롭네. 누가 양복 해준다던?”
“이 사람이 이제 입을 싹 닦으려고 하네.”
“하하 알았어. 양복이 문제겠어? 어쨌든 너무 늦었어. 너도 내일 출근할 놈이 여지껏, 으이구.”
“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너나 잘해 임마.”
“그래,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조만간 한잔하자. 나 지금 진짜 자야 해.”
“그려 알았숴! 굿 나잇 프렌드.”
“오케이.”
찬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누웠다. 그러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분파에다가 혼자 잘난 맛에 사는 뚱딴지같은 친구지만 녀석 때문에 은미를 만났고, 늘 기분 좋은 에너지를 주는 친구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렇게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찬혁은 기절한 듯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의 시간은 지구에서 허락된 시간과는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마치 둘만의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사랑의 도파민은 모든 것을 허락한다. 그런 시간이 두 사람에게 드디어 찾아왔다. 바로 토요일 오후 네 시가 다가온 것이다. 찬혁은 설레는 마음과 들뜬 기분으로 원룸을 깨끗이 청소하고, 깔끔한 옷차림에 향수도 뿌리며 서둘러 간석오거리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 보였다. 심지어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지나가는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 얼굴도 나름 멋지게 보였다. 찬혁은 세상에 이런 종류의 콩깍지는 평생을 눈에 끼고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인간 스스로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많이 알고 고통스럽기보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서 행복하다면 차라리 후자가 복 받은 인생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전철이 한 대 두 대 지나가고 세 번째 전철이 도착하자, 서로 약속한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찬혁의 눈에 천천히 정지하는 전철 문 안쪽에서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은미를 발견했다. 찬혁의 가슴이 또다시 콩닥콩닥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은미가 다가왔다.
“봉봉 안녕?”
은미의 밝은 미소에 찬혁은 다가가 그녀의 양쪽 볼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안녕? 봉봉, 보고 싶었어.”
“나도.”
봉봉이라는 애칭은 새벽까지 통화를 하면서 만든 것으로,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 쓰여질 호칭을 몇 시간 고심끝에 의논하며 만든 애칭이었다. 프랑스어로 좋다는 의미도 있지만, 달달한 초콜릿 종류를 뜻하기도 하기에 선택된 것이었다. 찬혁은 양손으로 감싼 은미의 얼굴을 살며시 앞으로 당겨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전철에서 내린 사람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은 이미 다른 시공간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봉아, 가자.”
“그래.”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전철역을 빠져나왔다. 거리는 찬바람이 불었지만 상쾌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은미의 목에는 무지개 색 머플러가 둘러있었다. 원룸에 들어서자 속상한 듯 찌푸린 얼굴을 한 찬혁이 은미를 와락 끌어안으며 한마디 했다.
“매번 올 때마다 미안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작은 방 때문에 자기가 불편하니까.”
“아니야 괜찮아. 그래야 더 가까이 있지.”
찬혁은 말이라도 예쁘게 해주는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찬혁은 두 팔로 은미의 허리를 감싼 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은미는 두 손으로 찬혁의 얼굴을 감싼 채 바라보았고, 두 사람의 입술이 뜨겁게 포개졌다. 방안은 순식간에 따뜻하고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워졌다.
“와 이게 다 뭐야? 정말 자기가 한 거야?”
남자치고는 제법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의 찬혁은, 은미를 생각하며 정성껏 준비한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와 홍합탕이 은미의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접시 가장자리에는 방울토마토와 셀러리로 예쁘게 가니시가 플레이팅 되어 있었고, 커다란 궁중 팬 속 홍합탕 위로는 홍고추와 대파가 어슷 썰기로 뿌려진 채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거기다가 분위기를 띄워줄 맥주와 소주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럴듯하지? 자 앉아, 내가 앞 접시에 담아줄게.”
“자기 정말 대단하다. 이걸 언제 다했어?”
“에이,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래, 별거 아니야.”
“난 이런 거 못하는데.. 앞으로 자기가 다 해 줄 거지?”
“으이그 요런 얌체 같으니라고.”
찬혁은 앞접시를 가져다가 홍합과 국물을 담아서 은미 앞에 놓자마자 은미가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음미했다.
“우와, 시원하고 칼칼한 게 너무 좋다.”
“그치, 그치? 홍합국물이 엄청 시원해. 저렴하면서도 해장용 국물로는 끝이라고 보면 돼. 후추랑 청양고추로 맛을 내서 칼칼하면서도 시원할 거야.”
은미는 고개를 숙이고 홍합국물을 연신 숟가락으로 떠먹느라 찬혁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있었다.
“얼굴이 접시에 빨려 들어가겠다. 하하하.”
“감기기운이 있는지 오싹했는데, 뜨거운 게 들어가니까 너무 좋다.”
감기기운이라는 소리에 찬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은미를 바라봤다.
“그래? 괜찮은 거야? 약은 먹었어?”
“응 괜찮아. 기분이 그렇다는 거야. 푹 자면 나을 거야. 자기야 나 소맥 한잔 만들어줘.”
찬혁은 여전히 은미가 걱정됐다.
“정말 괜찮겠어? 술 마시면 안 되는데.”
“에이 괜찮아. 감기 가지고 뭘 그래. 자기가 다 가져가든지 그럼.”
“뭐라고? 이런 하하하.”
“호호호.”
“그래! 나한테 다 줘라. 까짓 거 내가 앓는 게 마음이 편하지.”
“뭐야 농담이야. 둘 다 앓아누우면 안 되지.”
“자 건배!”
“응, 음식 하느라 고생했어. 잘 먹을게.”
은미는 늘 그렇듯이 찬혁이 해준 파스타와 홍합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찬혁은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은 생각에 매우 기뻤다. 한참 동안 음식을 맛있게 먹던 은미가 소맥을 들이켜고는 질문을 했다.
“자기야 나 할 말 있는데.”
“응 뭔데?”
은미는 찬혁을 바라보다가 수줍은 듯 술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에게 바라는 나의 생각.”
“우리에게 바라는?”
“응 별거 아니지만 생각을 좀 해봤어.”
“그래? 뭔데?”
은미가 잠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찬혁을 다시 쳐다봤다.
“톡으로 보냈어. 한번 읽어봐.”
찬혁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첫 번째. 싸우면 먼저 사과하고 하루 안에 풀기.
두 번째. 바빠도 하루 한 번은 전화나 톡 하기.
세 번째. 사랑해라는 기분 좋은 말이나 칭찬 자주 하기. 사랑해 는 많이 할수록 좋아.
네 번째. 친구 같은 애인이지만 존중과 배려해 주기.
다섯 번째. 상대방에게 서운하면 쌓아 두지 말고 말해서 풀기.
여섯 번째. 거짓말하지 않기.
일곱 번째. 기념일 기억해 주기.
글을 읽은 찬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고는 분주하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찬혁을 은미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곧이어 은미의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잘할게. 노력할게. 너 실망 안 시킬게.
멋진 남자는 못돼도, 후회 안 하도록 할게.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죽는 날까지 노력할게.
휴대폰을 바라보던 은미가 미소를 지으며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찬혁이 그런 은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어, 왜 그래?”
“아니야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그래. 가슴이 뭉클해지고.. 고마워”
“에이, 바보같이 울긴.”
은미가 양손으로 눈가를 닦으며 기어들어가는 듯 혼잣말을 했다.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 그래서 꿈만 같아서..”
찬혁은 은미옆으로 다가가 은미의 어깨를 감싸 안아줬다.
“이제 우리 둘이 행복하자.”
“응 꽁냥꽁냥 하면서..”
“그래 그래.”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준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과, 하늘에 있는 별도 따서 줄 것 같이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가 옆에 있다. 하지만 은미는 이혼 후 혼자 어린 딸을 기르며 힘들게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떠오르며 설움이 더욱 복받쳤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힘들었던 과거를 잊으려고 고개를 저으며 간신히 눈물을 닦아냈다.
“우리 울보 감격해서 우는 것 치고는 너무 서럽게 우는 거 아니야?”
눈물범벅이 된 은미의 얼굴을 보고 찬혁은 당황하며 눈치를 살폈다.
“아니야 괜찮아. 그냥 지난날이 생각나서.”
“에이 뭐 하러 그런 생각을 해. 지난 일은 잊어버리자. 응?”
“그래 그래야지. 그냥 나도 모르게 떠올라서.. 그냥 지금 너무 행복해서 그런가 봐.”
찬혁은 두 손으로 은미의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눈가의 눈물과 뺨에 묻은 눈물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닦아주었다.
“내가, 입으로 먼저 장담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 때문에 자기 눈에서 눈물 나는 일은 절대 없도록 노력할게.”
“그래 고마워.”
찬혁이 자신을 위해서 노력하려는 모습에 은미는 고개를 들어서 밝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아 참, 그리고 한 가지. 의논할 게 있어.”
찬혁의 대화주제가 갑작스럽게 바뀌자 은미도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궁금한 표정으로 찬혁을 바라보았다. 그런 은미의 모습을 보고 찬혁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하하 쫄보. 하여튼 놀라거나 무서우면 눈부터 커진다니까.”
“에이씨, 놀리기야?”
“아니 놀리는 거 아니야. 귀여워서.”
귀엽다는 말에 눈물을 펑펑 쏟아내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금방 뾰루퉁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내밀며 장난기 있는 눈짓으로 밉지 않게 째려보는 은미가 찬혁은 마냥 귀여웠다. 내일 모래면 쉰 살을 앞둔 여자가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적어도 찬혁에게만큼은..
“이보세요. 여자한테 귀엽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아세요?”
은미가 여전히 뾰루퉁한 모습을 하고 찬혁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무슨 뜻이긴 좋은 거 아니야?”
찬혁의 말에 이번에는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은미의 오른쪽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콧방귀를 뀌었다.
“저렇게 뭘 모른다니까. 잘 들으세요. 아저씨! 귀엽다는 건 십 대나 이십 대에 젊은 친구들에게나 듣기 좋은 거예요. 나이가 오십이 다된 여자한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저씨!”
“아, 아 그런 거야? 난 또 뭐라고..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 음... 섹시하다?”
“흥!”
은미의 오른쪽 입 꼬리가 한 번 더 힘껏 올라갔다.
“아니야? 그럼 예쁘다?”
“아니 식상해 식상해.”
“에잇! 뭐야 몰라, 몰라. 뭘 어떻게 해야 돼?”
찬혁이 포기하려 하자 은미의 입모양이 이번에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처럼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렇게 쉽게 포기하기야? 행복하게 해 준다며! 노력을 해야지! 진심을 담아서!”
이번에는 찬혁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근엄한 모습으로 말했다.
“우리 봉봉이 최고야! 세상에서 제일 이뻐! 암 암.”
찬혁이 엄지까지 치켜세우며 큰소리로 외치자, 은미가 환하게 웃으며 용서해 줬다.
“그래, 알았어 봐준다. 그런데 의논할게 뭔데?”
찬혁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기어 들어가듯 말했다.
“나 아직 운전면허 없는 거 알잖아.”
“응. 그런데?”
“자기가 주말마다 전철 타고, 버스 타고 부천에서 오고 가기 힘들지 않아?”
“난 괜찮은데 왜?”
“내가 괜찮지 않아서 그래. 자기가 불편한 거 아니까. 그리고 운전면허를 따면 드라이브도 하고 자기 데리고 맛 집도 가고 싶어. 어떻게 생각해?”
찬혁의 제안에 은미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경제적인 문제가 떠올랐고,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나름의 이유 때문에 여윳돈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배려해 주는 찬혁의 마음도 고마웠기에 제안을 허락해 주었다. 그런 은미의 마음을 눈치챈 찬혁이 말을 덧붙였다.
“고마워. 그리고 직업을 바꿀까 생각 중이야.”
“왜? 힘들어서?”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지금 받고 있는 월급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어떤 일을 하려고?”
“늦은 감은 있지만 안정적인 기술을 배워놔야 나이를 더 먹어서도 안심할 것 같아. 운전면허를 생각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어서야.”
은미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는 끄덕였지만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 난 자기가 뭘 하던지 자기편이야. 우리를 위해서 내린 결론이라고 생각해. 위험한 일은 아니지?”
“좀 빡세긴 한데 해야지. 늦은 나이에 시도하는 새로운 도전이지만 잘 될 거야. 열심히 할게.”
“그래 자긴 뭐든 잘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
은미가 미소를 지으며 맥주병을 들어서 찬혁의 잔에 따라주었다.
“자 건배!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
“건배! 파이팅!”
며칠 후, 찬혁은 자신이 일하던 인쇄 회사를 그만두고,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화장품 케이스를 만드는 사출공장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이곳은 사장과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팀장과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한분까지 다섯 명이었는데, 찬혁이 입사하게 되어 전부 여섯 명이 된 소규모 공장이었다. 가족끼리 운영하는 회사다 보니 사출기계를 운영하는 팀장을 빼고는 사장아들 혼자뿐이라서, 무거운 원료를 나르거나 불량품을 분쇄하는 잡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기에 찬혁의 입사가 성사된 것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와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중견기업의 입사조차 힘들었기에 기술을 배우는 조건으로 이곳에 입사하게 되었다. 이곳은 사출기계가 전부 여섯 대인 작은 규모의 사업장이었다. 사출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높은 온도 때문에 실내작업장의 환경도 열악했고 주야 2교대 12시간씩 근무하는 힘든 직종이었지만, 미래를 생각하며 묵묵히 견뎌내며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했다. 어느덧 긴 머리와 늘 화이트 머스크향을 풍기는 자신만의 멋 부림도 점점 사라져 가고, 찬혁의 손에는 기름때가 묻은 장갑과 짧게 자른 머리 그리고 기름과 먼지가 묻은 안전화를 신고 있었다. 그렇게 찬혁은 은미가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며 고단한 공장생활을 버티고 또 버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