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 인연.
10년 전 12월.
어느덧 저릿저릿해진 겨울바람과 제 멋대로 흐느적거리듯이 보이지만, 차분하게 내리는 눈송이가 연말의 분위기를 더하는 초저녁 영등포 거리. 연말연시 시즌이라 사람들은 각자 즐거운 마음과 미소띈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모르는 사람이라도 서로 마주치면 하이 파이브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들뜬 분위기였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찬혁은 혼자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내리는 전봇대 옆에서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댔다. 땅바닥 주변에는 이미 세 개의 담배꽁초가 뒹굴고 있었다. 무지개무늬가 수놓아진 머플러를 두르고 코트의 허리춤에 있는 허리띠를 다부지게 맨 검은색 모직 트렌치코트, 그리고 반 나팔 블랙진에 검은색 웨스턴 부츠를 신고 있는 찬혁. 게다가 장발이라고 하기엔 다소 어정쩡한 길이의 뒷머리를 조랑말 꽁지처럼 묶은 모습은, 누가 봐도 음악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보통 그런 모습이라면 여자들이 질색팔색 할 그런 패션이었으나, 굳이 주변 지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다지 혐오스러울 정도는 아니라는 평을 듣는 정도의 준수한 외모였다.
계속해서 줄담배를 피워대도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굳어있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자식은 도대체..”
툴툴거리며 피우던 네번째 담배 꽁초를 부츠 굽으로 짓이기고 있을 때, 저 멀리 종종걸음으로 뛰는 시늉만 하면서 다가오는 친구를 발견했다. 친구 이름은 김 기명. 기명이는 사회에서 만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은 친구지만, 시원시원한 성격과 가끔 돌발적인 우스꽝스러운 행동 때문에 금방 친구가 되어버린 그런 친구였다. 활어 도매상에서 활어 회 운반차를 몰고 다니며, 사교댄스를 좋아하지만 외모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아니, 오히려 자기 멋대로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독특한 친구였다. 오늘도 역시나 일하다 막 뛰쳐나왔는지, 고무장화와 머리에는 피에로를 연상시키는 괴이한 두건을 두르고 수염은 깎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너 이 자식아. 지금이 몇 시야!”
찬혁의 다그침에 다가오던 기명이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 미안 미안, 오늘따라 차가 엄청 밀리네. 연말이잖아.”
“미친놈 지랄하네. 핑계를 대는것도 궁색하네.”
“야! 대중교통은 안 밀리냐?”
“그걸 뻔히 알면서 버스를 타는 건 뭐냐고. 전철은 파업한다던?”
계속해서 다그치는 찬혁을 기명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 어? 그래서 나 그냥 가? 그냥 간다?”
“아 그런데 이 새끼가 죽으려고 작정을 했네. 한번 가봐 어떻게 되나! 이걸 그냥 콱!”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짜식 쫄긴, 야 담배나 하나 줘봐 봐.”
찬혁이 째려보면서 마지못해 담배를 건네자, 기명이가 또 한 번 장난스럽게 능청을 떨었다.
“오, 그런데 오늘 뭐냐? 빠숀이 심상치 않은데. 흐흐.”
“야 지랄 말고 어서 가자. 추워 디지겠다.”
“오케이 오케이. 짜식 몸이 달았구만. 흐흐.”
“지랄.”
“야, 어쨌든 오늘 잘해봐라. 너의 운명의 여인이 오늘 그녀일지 누가 아냐. 응? 잘되면 알지?”
“으이구, 내일 모래면 나이 오십에 무일푼 딴따라를 누가 좋아한다고. 내가 여자라도 도망가겠구만, 됐어!”
“그런 놈이 이렇게 차려입으셨어?”
“그런데 이 자식이 오늘 자꾸 매를 버네, 너 이리 좀 와봐!”
찬혁이 기명이를 잡으려고 두 팔을 뻗자, 기명이는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야! 그래도 너 정도면 먹어 주잖아. 남자인 내가 봐도 뭐.. 게다가 너를 누가 마흔 후반으로 보겠냐. 내 말을 믿으라고.”
찬혁은 내심 듣기는 좋았으나 현실적으로 많이 부족한 자신의 형편 때문에 마음이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았다.
“자 이쪽으로 가시죠. 락커님.”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목적지를 안내하는 기명이를 찬혁은 오른팔로 기명이의 목을 휘감았고, 이내 둘은 어깨동무를 하며 흥이 오른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 찬혁은 지나치는 사람들의 대화하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행복이란 자신이 누릴 수 없는 사치라는 생각 때문에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야기하며 지나가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계획을 말하며 지나가는 사람,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많은 대화들 중에 특히 두 단어가 찬혁의 귓가에 맴돌았다.
‘가족’ ‘사랑’
찬혁은 아버지가 식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어지고 치료비 때문에 생긴 빚으로 인해서 신용불량자가 되어 삼십 대를 다 보냈다. 가까스로 신용회복을 하고 나니 지금 이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결혼할 시기를 놓치고 제대로 된 연애나 데이트를 못했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자랑스럽게 떠벌릴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친구 겸 애인이 되어버린 자신과 함께한 베이스 기타와 록 음악이 유일한 친구였고, 기타 연주는 신나는 데이트였다. 그렇게 외롭게 중년을 맞이한 찬혁에게 친구인 기명이가 드디어 소개팅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주점이 있는 골목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오색불빛과 소음에 가까울 정도의 흥겨운 음악이 흘렀고,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표정과 함께 어우러져 마치 페스티벌이 열린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많은 인파 속을 간신히 헤집고 어느 참치 횟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자! 여기다.”
양손을 허리춤에 올린 채 의기양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기명이가 웃음을 보이자 찬혁은 얼떨떨 했다.
“야, 이 추운 겨울에 무슨 참치 회냐?”
찬혁의 반응에 기명이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아놔, 이 사람이 또, 또 모르는 소리 하네. 회는 참치지. 넌 지금 겨울에 아이스크림 먹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거라고.”
“지가 처먹고 싶으니까 여기로 정한 거면서.”
찬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째려보며 받아치자 기명이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들켰네. 귀신같은 놈. 여기 맛 집이야 서비스도 기가 맥힌다구. 한번 믿어봐라.”
“얼린 회는 별론데. 야, 맛없으면 니가 돈 다 내라 알았어?”
“오케이! 자 들어가자.”
기명이가 당당하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걸을때마다 뽀작뽀작 소리가 나는 검은색 고무장화가 찬혁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웃기기도 했다. 우스꽝스러운 장화를 바라보면서 뒤를 쫓아 들어가며 가게를 휘이 둘러봤다.
“음, 가게 분위기는 꽤 그럴듯하네. 그렇게 싼 티 나지도 않고.”
“그치 그치? 내가 오늘을 위해서 아니, 너를 위해서 먼저 답사까지 했다는 거 아니냐.”
“그래, 그건 잘했네.”
예약확인을 마치고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서 정갈하게 세팅을 해놓은 룸으로 들어갔다. 6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넓은 식탁이었지만 네 명 자리만 세팅이 되어 있었다. 룸으로 들어온 찬혁이 여지없이 한마디 했다.
“그런데, 뭐 하러 룸으로 예약을 했어? 이러면 괜히 분위기만 어색해지는 것 같은데.”
기명이가 식탁에 놓인 물수건으로 손을 비비며 말했다.
“쫄보처럼 그러지 말고 앉아라 쫌. 그냥 밥 한 끼 먹는다고 생각해. 그러는 니가 더 어색하다 임마.”
기명이의 핀잔에 찬혁은 마지못해 코트를 벗고 기명이와 마주 앉았다.
“그런데 오늘 만남은 어떻게 마련하게 된 거야?”
찬혁의 질문에 기명이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 그냥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싱거운 놈, 제대로 말해봐. 어느 정도는 알아야 나도 대처를 하지. 느닷없이 나오라고 난리를 쳐서 나오긴 했지만.”
“너 내가 댄스 모임에 다니는 건 알지?”
“응 그래.”
“거기에서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 있는데, 같이 밥을 먹기로 약속하면서 아는 언니가 있는데 좋은 사람 없냐고 묻더라. 그래서 기냥 뒤도 안 돌아보고 있다고 했지. 잘했지?”
“이런 대략 난감한 놈을 봤나. 그래, 그래서 그게 나란 말이냐?”
“응 너만큼 괜찮은 놈이 어딨 냐?”
“듣기는 좋다만 내 형편을 알면서 으이구. 이 나이에 젊은 애들처럼 친구를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괜히 쪽팔릴 일을 벌였네.”
“이봐 이봐, 니가 그래서 안되는 거야. 벌써부터 김칫국부터 마시잖아. 인생을 뭘 그렇게 힘들게 사냐? 그냥 편하게 밥이나 한 끼 하는 거야. 잘되고 안 되고를 뭘 미리 걱정하냐.”
“그래, 넌 인생을 편하고 쉽게 살아서 좋겠다. 아, 괜히 나온 거 같네.”
“아, 그만 좀 툴툴대고 가서 술이나 좀 가져와봐.”
“벨 누르고 시키면 되지 무슨..”
“여긴 벨이 없다. 술은 직접 가져다 먹는 곳이야. 대신 술값이 조금 저렴하거든.”
“으이구, 알았어.”
찬혁이 일어나서 룸 밖으로 나갔다. 둥근 모양의 커다란 바가 있는 곳에는 두 명 정도의 손님이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며 식사를 하고 있었고, 주인은 찬혁을 발견하고는 친절한 미소로 손을 뻗어서 각종 술병이 들어있는 냉장고 쪽을 가리켰다.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테이블과 바에 손님들이 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명이의 호언장담에 살짝 기대가 생겼다. 찬혁은 맥주병과 소주병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자리에 돌아와서 술잔에 소맥을 말았다.
“자, 여기 받아라.”
“오케이 땡큐.”
두 사람은 서로 잔을 부딪치며 단숨에 술잔을 비워냈다.
“캬, 좋다! 그런데 친구야. 너 돌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돌싱? 그건 왜?”
“하여튼, 어떻게 생각하냐고...”
기명이가 스끼다시로 나온 메추리알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뭐 어떻게 생각하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별 상관없어.”
“그래? 그럼 됐어.”
“왜? 오늘 나온다는 여자가 돌싱이야?”
“일단 넌 그냥 모른척해.”
“알았어. 요즘 세상에 뭐 대단한 흠도 아닌데 뭘.”
“오, 좋아 그 열린 마인드. 그런 걸 따지는 사람들도 있어서 물어 본거야.”
“뭐 서로 마음 맞고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깊어지고 사랑한다면 그게 뭐 대순가?”
“그렇지 근데 주제 파악도 못하고 무조건 어리고, 이쁘기만 바라는 넋 나간 남자들도 있지. 자신의 주제파악도 못하는 놈들 말이야. 그런 면에선 넌 내 친구가 확실하네 하하.”
“모르겠어. 내가 아직 세상을 모르는 건지도, 하여튼 난 아직 사랑을 믿어. 그런 사랑을 하고 싶고. 몽상가 수준의 단꿈 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니야 아주 아주 좋아. 내가 너 같이 생기기만 했으면 여자 여럿 울리고 다녔을 텐데. 넌 여자엔 관심도 없는 걸 보면 답답할 때도 있지만 하여튼 대단하기도 해.”
“내 형편에 어울릴지 모르지만 운명 같은 인연을 만나고 싶다. 좀 늙어서 만나더라도.”
“또, 또 잘 나가다가 옆길로 빠지네. 이 사람아! 남자는 자신감이야. 겸손도 정도가 있지. 겸손이 지나치면 주접이야 알았냐?”
“너나 그렇게 살아. 난 나대로 살 테니. 별 걸 가지고 다 지랄을 하네.”
“이 사람이 몸에 좋고 뼈에 좋은 얘기를 해줘도 저러네.”
“됐어! 난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몸을 파는 여자라고 해도 믿고 사랑할 수 있어. 나를 만나기 전에 일은 모두 용서가 돼. 단지 나를 만나고 나서부터 그렇게 안 살면 되지. 또 그렇게 되도록 옆에서 사랑해 주고 도와주는 게 남자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어이구 어이구 성인 나셨네. 나가도 너무 나갔어.”
“나한테 지랄 말고 너나 잘해.”
“아 알았어, 알았어. 그만하자.”
“자! 한잔 받아.”
두 사람은 다시 잔을 기울였다. 시원한 술이 몸속으로 스며들어 기분이 상쾌해지자 찬혁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분주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습 속에서 눈에 띄는 두 명의 여자들이 보였고, 그중에 짧은 보브 헤어스타일에 아이보리 코트와 스카프를 두른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그녀들의 동선을 따라가며 지켜보았다. 그녀들의 발걸음이 느려지며 가게 문 쪽으로 가는 것이 보이자, 왠지 오늘의 주인공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야, 야 온 거 같다.”
찬혁의 말에 기명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오, 왔구나. 어서 와.”
기명이의 반응에 찬혁도 몸을 돌려서 그녀들을 마주했다. 찬혁은 기명이의 인사에 활짝 웃는 여자 뒤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또 한 명의 여자를 보았다. 짧은 보브 스타일의 커트 머리지만 옆머리가 살짝 긴 스타일이 참 매력적이다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히 균형감 있는 체형에 깔끔한 옷매무새와 표정이었다.
“자 인사 해. 여긴 내 댄스 파트너이자 동생인 선영이. 그리고 이쪽은 내 친구 찬혁이.”
“반가워요.”
“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찬혁이 선영이와 인사를 나누고 선영이가 소개를 이어갔다.
“여긴 저와 제일 친한 언니예요.”
“아 네 반갑습니다. 박 찬혁이라고 합니다.”
찬혁이 목례를 하자 그녀도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배 은미 라고 합니다.”
찬혁은 고개를 숙일 때 옆머리가 살짝 얼굴을 가려지는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인사를 마치고 기명이가 자리를 안내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기명이가 찬혁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드디어 네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고, 기명이가 예약한 음식을 요청하는 동안 약간의 어색한 공기흐름이 생겼지만, 찬혁은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곧 기명이가 능숙하게 조절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찬혁은 분위기를 띄우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찬혁은 은미의 모습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그러면서 묘한 감정이 생겼다. 일반적으로 천생연분을 만나면 망치로 머리를 맞는 느낌이나 혹은 번쩍하고 후광이 비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그런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나올법한 그런 상황보다는 잔잔하고 넓은 호수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던져진 느낌이었다. 자꾸 눈길이 가기 시작했고, 궁금하다 못해서 질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 자, 일단 한잔씩들 받으시고, 이게 또 알코올이 좀 들어가야 서먹서먹한 게 풀어지거든요.”
기명이의 너스레에 두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건배를 하기 위해 술잔을 들자, 드디어 기명이만의 스타일이 나왔다.
“오바마!!”
기명이가 건배사를 외치자 선영이가 질문을 했다.
“오바마? 그게 뭐야?”
“이 사람이! 아직까지 이런 것도 모르고 말이야. 오빠가 바래다줄게 마시자.”
기명이의 말에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그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 해졌다.
그렇게 건배가 몇 번 이어지고, 기명이와 선영이 두 사람의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찬혁과 은미는 지켜보다가 가끔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찬혁은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두 사람도 말 좀 해요. 고딩들도 아니고 뭐야 이게.”
보다 못한 선영이가 재촉을 하자 기명이가 거들었다.
“에헤이, 그렇게 대놓고 말하라고 그러면 더 이상하지. 두 사람 잘 어울리는데 그냥 뽀뽀부터 해라.”
“아유, 미쳤나 봐. 오빠는 무슨 그런 반가운 소리를.. 호호.”
기명이와 선영이의 놀림에 가까운 재촉에 두 사람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면서 찬혁은 은미를 쳐다보았고 눈이 마주친 은미는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은미의 그런 모습에 찬혁의 가슴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느덧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네 사람은 처음보다 많이 가까워지고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그러다가 찬혁이 은미 앞에 놓인 앞 접시를 발견했다.
“회를 안 좋아하세요? 잘 안 드시네요.”
“네, 제가 회를 잘 못 먹어서요.”
“아, 이런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이 녀석이 지가 먹고 싶다고 이곳을..”
찬혁이 기명이의 뒤통수를 장난스럽게 때렸다. 기명이가 머쓱해하며 말했다.
“진작 말씀하시지 다른 거 시켜드렸을 텐데.”
“아니에요. 아예 못 먹는 건 아닌데, 여기 다른 거 먹으면 돼요.”
“아유 마음씨도 고우셔라. 얌마 찬혁아! 넌 복 받은 거야 제수씨가 저렇게 이해심과 배려심이 넓다.”
“오빠 만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제수씨야. 정말 웃겨. 호호.”
선영이가 기명이의 말에 끼어들자 기명이도 이에 질세라 말을 이어받았다.
“이 사람들이! 아니 뭐 까놓고 말해서 어린애들도 아니고 좋으면 그냥 직진이지. 소금에 곰팡이 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내가 아까부터 딱 보니까 둘이 뭔가 오고 가는 눈치던데, 아니야?”
기명이의 말에 선영이도 두 사람을 번갈아가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게, 처음보다 뭔가 달달 한데? 호호.”
“얘! 그만해.”
기명이와 선영이의 놀림에 은미도 싫지만은 않은 듯, 꾸짖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찬혁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두 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기명이의 소매 자락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야 임마. 적당히 해라. 처음부터 뭐 하는 거야 민망하게.”
“아 놔, 이 사람이 말이야. 내가 이렇게 안 하면 니가 알아서 하겠냐?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래 다 좋은데 이제 그만해. 너 취했어.”
“이 사람이 이 사람이... 멀었어! 괜찮아. 여기 마무리하고 우리 2차 가자. 노래방 갈까?”
“나 노래방 싫어하는 거 알면서 무슨..”
“야야! 초치지 말고 이 엉아가 하자는 대로 따라와.”
“그만 좀 해 인간아.”
“이 사람이 정말!”
찬혁은 거나하게 취해버린 기명이를 다독이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은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은미의 말에 실망한 건 사실 기명이만은 아니었다.
“에이, 오랜만에 좋은 사람들끼리 만났는데, 가시게요?”
기명이의 아쉬워하는 말에 선영이도 거들었다.
“그래 오빠, 나도 가봐야 해.”
“다들 재미없다. 이제 막 시작하는 분위기인데. 그러지 말고 우리 딱 한 시간만 노래방 가서 술 좀 깨고 가요.”
기명이가 마지막 히든카드를 꺼내 들자. 은미가 찬혁이를 바라보며 도와달라는 듯 한 표정과 미안함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다음에 또 보면 되죠.”
찬혁이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자, 기명이가 팔꿈치로 찬혁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게 맞는 거 같아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보면 좋겠네요.”
선영이 종지부를 찍는 말을 꺼내자 기명이도 포기하듯이 대꾸했다.
“이 사람들이 정말, 알았어 알았어. 그럼 딱 한 병만 더 먹고 일어나자.”
기명이의 마지막 제안에 나머지 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받아 주었고, 기명이를 달래는 건배를 또다시 몇 번을 하고서야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파인 기명이는 연신 원망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계산도 자신이 하겠다며 나누어 내자는 선영이를 뿌리치고 혼자서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밖에는 아직도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기명이를 기다리는 나머지 세 사람은 기명이가 나오자마자 작별인사를 했다.
“자, 우리 찬혁이 하고 은미 씨는 알아서 잘 들어가실 테고.. 아니지 둘이 같이 있으면 더 좋고. 하하하. 근데 저기, 있잖아 선영아 나 좀 보자. 할 말이 있는데 잠깐 커피 한잔 하자.”
기명이는 선영이에게 눈짓을 하고는 낚아채듯 팔짱을 꼈다. 선영이도 눈치를 챈 듯이 은미와 찬혁에게 서둘러 인사를 했다.
“언니 조심히 들어가 톡 할게. 찬혁 씨 즐거웠어요. 울 언니 잘 좀 바래다주세요.”
“그래. 너도 조심히 들어가. 기명 씨 고마웠어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기명아 전화해라.”
손을 흔드는 기명이와 선영이는 기명이의 알 수 없는 귓속말과 장난스러운 몸짓에 하하 호호하면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저 은미 씨 집이 어디예요?”
“저는 부천이에요.”
“아, 그럼 여기서.”
“신경 쓰지 마세요. 택시 타고 들어가면 돼요. 찬혁 씨는 어디예요?”
“전, 인천 간석동이요.”
“아 네.”
“여기서 전철 타고 가다가 부평에서 인천 전철로 갈아타면 됩니다.”
“아 그렇구나.”
잠시 몇 초 동안 대화가 끊어졌고, 어색하고 뻘쭘한 상황을 깬 건 은미였다.
“저, 오늘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제가 뭘 해드린 것도 없는데요.”
“아까, 회를 못 먹는다고 할 때 새우튀김을 챙겨주셔서 고마웠어요.”
“아 그거요? 좀 더 일찍 신경 써 드려야 했는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어요.”
은미의 고맙다는 말에 찬혁은 좋은 기분과 살짝 들뜨는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제가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니요. 제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래요.”
은미가 잠시 망설이다가 찬혁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나섰다.
찬혁은 택시 승강장까지의 거리가 다른 때보다 빨리 가까워짐을 느끼자 조급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고픈 말을 몇 번을 삼키고 삼키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눈송이만 바라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 혹시.”
“네?”
은미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찬혁은 참지 못하고 결국 말을 꺼냈다는 것에 대해서 금방 후회를 했다. 하지만 지금 은미는 찬혁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순간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냥 저.. 아, 그러니까 요즘 세상이 워낙 험해서 그러는데요.”
은미가 여전히 궁금한 표정으로 찬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번을 주실 수 있으면 제가 택시 번호를 문자로 보내 드릴까 하구요.”
누가봐도 궁색한 핑계였지만, 은미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찬혁이 귀엽기도 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은미도 장난기가 발동했다.
“에이, 제 나이 아시잖아요. 나이 많은 아줌마한테 누가 관심이나 있겠어요.”
말을 마친 은미는, 내심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해서 일부러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찬혁을 바라보았다. 아니다 다를까 찬혁의 대답이 바로 나왔다.
“에이, 아니에요. 은미 씨 그렇게 안 보여요. 정말이에요. 오늘 뵙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정말이요? 기분 좋은데요.”
은미는 나이답지 않게 당황하는 찬혁이 조금씩 자신의 눈에 들어왔다. 훤칠한 남자다운 모습과 검정색 모직 트렌치코트, 부츠 컷 블랙진에 부츠를 신고 무지개 색 머플러를 두른 남자. 그런 모습이 은미의 눈에 점점 자세히 보였다. 사랑은 그런 것 인가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느 순간 점점 명확히 보여지는 것. 혹은, 그렇게 보여지는 사람. 그런 것 인가보다. 은미는 걸음을 멈추고 앞서 걸어가는 찬혁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찬혁은 앞장서서 걷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은미가 걸음을 멈춘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그냥 옷이 잘 어울리셔서 잠시 구경했어요.”
찬혁은 오래된 낯선 칭찬에 또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여성으로부터의 칭찬이던가. 그것도 호감이 가는 여성에게.
“휴대폰 줘 보세요.”
갑작스러운 반가운 소리에 찬혁은 군더더기 없이 재빠른 동작으로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은미가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걸었다. 은미의 휴대폰에 벨소리가 울렸다.
“제 번호예요.”
“감사합니다.”
“호호. 감사할 것까지는 없는데. 찬혁 씨 재밌는 사람이네요. 마치 소년 같기도 하고.”
“그래도..”
찬혁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미소와 함께 당황하는 모습 때문에 은미가 찬혁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찬혁 씨. 아까 보니 우리 동갑이던데. 편하게 말해요.”
“그래도 오늘 처음 만났는데요.”
“전번 달라는 거 연락하면서 지내자는 뜻 아니에요? 그럼 동갑인데 편한 게 좋잖아요.”
갑작스런 은미의 제안에 찬혁이 용기를 냈다.
“좋아요. 말 나온 김에 우리 친구 합시다.”
“친구?”
“네 편하게.”
“좋아요.”
찬혁의 용기 있고 당당한 모습에 은미는 아까 찬혁의 당황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 바래다줄게. 은미야.”
“어? 금새 말 놓네.”
은미가 미소를 지은 채 찬혁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대며 말하자, 가까워진 얼굴 때문에 찬혁의 얼굴이 빨개졌고 그 때문에 은미는 더욱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친구면 당연히 말을 놓는 거지. 친구한테 존대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
은미는 찬혁의 빨개진 얼굴이 재미있어서 앞을 가로막고 까치발을 한 채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대며 바라보았다. 그러자 찬혁이 슬그머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래, 맞는 말이야. 자 여자 친구 에스코트 해줘.”
“여자친구? 그냥 친구 아니고?”
“그럼 내가 남자친구야?”
“그건 그렇지.”
“정말 재미있다. 호호호.”
은미는 모처럼 즐거웠다. 두 사람 나이에 순수하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두 사람에게만큼은 그랬다. 두 사람에겐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었다. 이런저런 대화주제가 하나둘 생겨나는 도중에 이를 방해하는 택시가 나타났다. 찬혁은 택시가 그토록 원망스럽기는 난생처음이었다. 평소에는 그토록 눈에 보이지 않던 택시라는 물체가, 하필이면 이순간에 이토록 금방 나타났으며 또 일부러 훼방까지 놓는 것인지 얄미울 지경이었다.
“찬혁 씨 나 갈게.”
“응 조심히 가. 전화 할게.”
“그래. 찬혁 씨도 조심히 들어가.”
얄미운 택시가 출발하자 찬혁은 멀어져 가는 택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분 좋은 뿌듯함과 함께 가슴 한구석에 저릿함이 느껴졌다. 그 순간, 저만치 가던 택시가 멈추고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민 은미가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찬혁은 놀라서 멈춘 택시를 향해서 서둘러 뛰어갔다.
“왜? 무슨 일이야?”
은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기, 다음에 만나면 그 머플러 나 줄래?”
“어? 이 머플러?”
“응. 맘에 들어서.”
“이거 비싼 것도 아닌데.”
“그런 이쁜 무지개 머플러 처음 봐. 갖고 싶다.”
“그래?”
무얼 망설이겠는가. 찬혁은 택시기사가 투정을 부리기전에 서둘러 머플러를 풀어서 은미의 목에 둘러주자 은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지금 말고 나중에. 찬혁씨는 어떡하려고? 추울 텐데.”
“난 괜찮아. 은미씨가 좋다면 이까짓 쯤.”
찬혁의 말에 은미가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찬혁 씨.”
“그래 잘 가. 기사님 잘 부탁합니다.”
택시기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출발했고, 찬혁은 택시가 안 보일 때까지 눈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찬혁은 추운 겨울바람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고, 길거리의 많은 연인들도 더 이상 부럽지 않았다.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자면, 그림 속에는 눈 내리는 하얀 겨울밤 멀리 보이는 택시한 대와 눈을 맞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서있는 한 남자가 있는 풍경화일 것이다. 연인들의 세상은 그렇다. 건물도, 거리도, 가로등도, 심지어 오고 가는 사람들 까지도 모두 의미 없는 하나의 배경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