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죽음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불과하지만 찰라의 사랑은 영원히 기억되리라.
그대를 바라보던 따스한 눈길은 영혼속 깊이 간직될 순간이며, 그 기억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것 역시 축복이니 사랑을 기억하라. 메멘토 아모리스!
내 영혼이여, 이제 그 기억을 가슴에 품고 부디 제일 좋은 곳으로 영면하라...
1 화 은정
3월 어느 날 햇살 밝은 아침.
휴대폰의 알람소리에 눈을 뜬 은정은, 새벽잠을 설치는 통에 피곤이 덜 풀린 몸을 간신히 일으키고는 거실로 나와서 커튼을 활짝 열었다. 8층 높이의 아파트 거실 안으로 제법 따스한 햇살이 이제 곧 봄이 다가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어제저녁, 이유 있는 늦잠으로 컨디션은 별로였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미소로 가득 채우리라 다짐하며 창문을 힘껏 열었다. 아직은 서늘함을 품은 봄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거실로 재빠르게 들어왔다.
‘휘잉~‘
생각보다 예사롭지 않은 바람 때문에 놀란 은정은, 서둘러 부엌으로 가서 가스레인지위에 찻 물을 올렸다. 잠시 뒤, 물이 끓기 시작하자 따끈한 레몬차를 한잔을 들고 창가로 다시 다가갔다.
‘덜컹덜컹덜컹’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철길 위로 전철이 지나갔다. 은정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머그컵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레몬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창가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콜록콜록.. 콜록콜록.”
은정은 인상을 쓰면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꺼버렸다. 매번 애를써 보지만 담배만큼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절반 이상이나 남은 채 짓눌려진 장초들 사이에서, 담배연기가 모기향처럼 기다랗고 얇은 꼬리를 만들며 천정을 향해 유영하듯 가늘게 뻗어갔다. 은정은 마치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걸린 비행청소년처럼손사래 치듯 연거푸 연기를 흩어지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눈부신 아침햇살이 반가운 은정은 늘 그랬듯이 하늘을 향해 양팔을 곧게 뻗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한동안 그렇게 햇살과 바람을 느꼈다.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 따사로운 봄 햇살,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와 자동차 경적소리 그리고 도시의 소음들, 은정에겐 이런 모든 사소한 것들이 감사했다. 그 모든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올리 듯, 매일 아침 이렇게 거실에 나와서 양팔을 벌리고 의식을 치르는 마법사처럼 신중했다. 적어도 은정에겐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감사함이 넘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에..
은정은 감은 눈을 살며시 뜨며 눈꺼풀 사이로 들어오는 시리도록 밝은 봄 햇살과 도시의 풍경들을 차분히 감상했다. 그러고는 다시 두 손을 합장한 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감긴 두 눈 사이에서 배어 나온 얇은 눈물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입 꼬리 언저리로 흘러내려 살포시 자리를 잡았다.
[띵동 띵동]
초인종 소리에 놀란 은정이 서둘러 손등으로 눈과 입을 닦으며 거실 벽에 달린 인터폰을 바라보더니, 방문객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깔끔한 옷차림의 한 여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일찍 왔죠?”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여자는 짙은 감색 바지에 흰색 블라우스와 헤링본 재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저 회사원정도의 차림새에서 더도 덜도 아닌 듯 보였지만, 어깨에 멘 큼지막한 메신저 백 때문에 일반 직장인과는 조금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안녕하세요.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은정이 거실 쪽을 가리키며 안내하자, 집안으로 들어선 여자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명함 한 장을 은정에게 내밀었다.
“선진 출판사 편집장 이 선우라고 합니다.”
은정은 급하게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마른기침을 뱉으며 건네받은 명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정중한태도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박 은정입니다. 저희 집에는 커피가 없어요. 레몬차가 있는데 괜찮으세요?”
“아 네, 좋아요.”
은정은 손님에게 대접할 차를 준비하기 위해서 주방으로 갔다. 뜨거운 물을 부은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기분 좋게 얼굴을 감쌌다. 선우는 소파에 걸터앉아서 두리번거리며 거실을 둘러보다가 레몬향기가 느껴지는 주방쪽을 바라보았다.
“집이 아담하고 좋네요.”
선우의 인사치레에 은정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원래 정리를 잘 안 하는 스타일인데 오신다기에 부리나케 치웠어요. 서둘러 치운 티가 나죠?”
은정이 레몬차가 든 찻잔을 건네자 선우가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았다.
“드셔보세요. 저의 어머니가 직접 만드신 레몬 청입니다.”
선우가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더니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신맛도 적당하고 그렇게 달지도 않고 맛있네요.”
“제가 잔병치례가 많다 보니, 어머니가 저를 위해서 만들어 주신 거예요.”
정말로 맛있었는지 선우는 연달아 두어 번 찻잔을 입에 갖다 댔다.
“너무 좋네요.”
선우가 테이블 위에 찻잔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창문에 기대어 밖을 응시하고 있는 은정에게 말을 걸었다.
“작가님의 원고를 읽어 봤어요. 또, 저희 직원에게 대충 이야기까지 듣고 왔습니다.”
은정이 여전히 창밖의 풍경을 응시한 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미소에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출간 작가가 아니다 보니 글이 재미도 없고 엉망이죠?”
은정의 자신감 없는 말투에 선우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궁금했어요. 보통 자녀분들이 부모님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려고 하는 게 흔하지 않아서요. 게다가 출간작가도 아니신데도 스토리 구성이 좋던데요.”
은정이 인정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서 선우를 마주 봤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부모님의 이야기를 쓰는 자녀들 .. 그렇죠, 흔하진 않죠.”
“뭐랄까요, 작가님의 원고를 읽고 난 후에 가슴속에서 따뜻함과 함께 감동이랄까요? 정말로 흔하지 않은 스토리이기 때문에 작가님을 직접 뵙고 싶었어요. 물론 편집에 필요한 정보도 조금 더 여쭤보고 싶기도 했고요 “
은정이 팔짱을 끼고서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네. 충분히 공감합니다.”
선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정은 뭔가 깜박 잊은 듯한 표정으로 빠르게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서 뭔가를 들고 나오는 은정의 모습을 본 선우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은정의 두 팔에 안겨 있는 것은 하얀색의 커다란 곰 인형이었다. 곰 인형도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 듯 표면이 거칠어 보였으나 제법 관리가 잘되어있는 상태였다. 까만 눈과 코 그리고 입가에는 방긋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목에는 핑크색 리본이 보우타이처럼 양 갈래로 묶여 있었다. 리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언제나 곁에서 지켜줄게. 사랑해>
곰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우는 시선을 돌려서 은정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게 그 곰 인형인가요?”
“맞아요.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준 선물.”
커다란 양쪽 팔을 길이대로 축 내린 채 방긋 웃고 있는 곰 인형은, 은정에게 안긴 채 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실제로 보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이 곰 인형이 이야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아니 이야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죠.”
“이해할 것 같아요. 저는 이미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까요.”
양손으로 인형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지그시 미소를 짓던 은정이, 곰 인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질문했다.
“편집장님.”
“네?”
“편집장님은 사랑을 믿으세요?”
“음, 어려운 질문이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믿고 싶어요.”
은정이 선우에게 고개를 돌리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 믿고 싶으세요?”
“제 생각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사랑마저 없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 너무 형식적인 답일까요?”
자신의 대답이 너무 건조했다고 생각한 선우가, 고개를 들고는 무언가를 찾는 시늉을 하듯 허공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질문했다.
“작가님은 어때요? 사랑을 믿으세요?”
선우의 질문에 은정은 곰 인형을 끌어안은 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랑.. 안 믿었죠. 하지만 이제는 믿고 싶어 졌어요. 아니, 믿을 수밖에 없어졌어요.”
“음, 그런데 왜 아직 혼자 살고 계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괜한 말을...”
“아니 괜찮아요. 그냥 아버지 같은 남자를 못 만났다고 하면 그럴싸한 핑계로 딱 이겠죠?”
은정이 쑥스러운 미소를 보이자 선우도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저, 그럼 이제 부모님의 궁금한 점에 대해서 질문을 좀 드려도 될까요?”
은정은 인터뷰를 시작하기 위해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어릴 적 일도 기억을 잘 못하는데, 다른 사람의 지난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것이 좀 무리가 있기는 해요. 그래서 픽션이 가미된 것이지만.. 그냥 제가 보고 느끼고 들어서 아는 범위 안에서는 전부 말씀드릴게요. 물론 어디서 어디까지가 픽션인지는 비밀이랍니다. 어쨌든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
“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왔습니다.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선우는 손바닥만 한 녹음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녹음준비를 하고는 노트를 펼쳐서 메모할 준비를 했다. 앞에 놓인 거실 테이블이 마치 자신의 사무실 책상인 듯 거침없이 준비를 했다. 은정은 그런 선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직업적인 특성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스마트 폰을 안 쓰시네요?”
선우가 작은 녹음기를 집어 들며 흔들었다.
“아, 이거요? 저는 손때 묻은 오래된 물건을 좋아해요. 마음이 편하거든요. 메모도 종이에 연필로 직접 쓰고요. 사각거림과 향나무냄새 그리고 지우개의 촉감이 좋아요. 별스럽죠?”
“좋은데요. 익숙한 것에 대한 애정.”
선우는 은정의 긍정적인 반응에 기분이 좋아졌다.
“주변에서는 별나다 답답하다 등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오늘은 기분 좋은데요. 동지를 만난 거 같아서.”
“차가 식었네요. 다른 차 드실래요? 코코아랑 홍차도 있어요.”
“그럼 홍차가 좋겠어요.”
주방으로 걸어가던 은정이 뭔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고는 휙 하고 선우를 향해서 돌아섰다.
“혹시, 홍차에 아이리시 위스키 한 두 방울 정도 괜찮아요? 향이 좋거든요.”
“오, 그래요? 아이리시 위스키는 안 마셔봤는데. 한번 도전해 볼게요.”
“도전하실 만큼 그리 비싼 술은 아니지만 향이 다른 위스키와 달라요. 특이하다고 할까, 한번 드셔보세요.”
“좋아요.”
아이리시 위스키를 품은 홍차의 향기는 물 위에 잉크가 떨어지듯이 주방에서부터 거실까지 은은하게 퍼졌다.
“아, 향이 특이하면서도 좋은데요. 매력적이에요.”
은정이 선우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이리시 위스키 제임슨이 들어간 홍차입니다. 자 드셔보세요.”
선우는 향긋하면서도 콧속을 찌르는 위스키 향 뒤에 따라 올라오는 홍차의 그윽함과 더불어 몸속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좋아요. 정말로 매력적이네요.”
“그렇다고 스트레이트로 드시는 건 비추입니다. 머리 깨져요. 호호.”
“가끔 인간에게는 의도적인 고통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자극을 주는거죠. 그것으로 더 큰 고통이나 상처를 치유하기도 하니까요. 그중에 하나가 술이 아닐까 생각해요. 물론 자주 마시면 역효과가 나겠지만.”
“의도적인 고통이라. 술의 또 다른 이름이군요.”
“그냥 저의 개똥철학입니다.”
선우의 너스레로 두 사람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고, 알코올이 더해진 홍차만큼 따뜻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런 두 사람과 함께 소파에 앉아있던 곰 인형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변함없는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봄 햇살이 두 사람이 마주 앉은 거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