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화 운명의 시작.
서울 방향 군산휴게소 주차장.
휴게소에 도착 후 주차한 뒤, 가방을 열어 로또용지를 꺼냈다.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로또 용지는 가방 속에서 이리저리 굴러서 구겨질 대로 구겨진 상태였다. 혹시라도 찢어질세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펼쳐 보자 가슴이 방망이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막상 당첨 조회를 하려고 하니 긴장이 되었다. 왼손에는 로또용지를 들고 오른손에는 휴대폰을 들고서 조심스레 QR코드에 갖다 댔다. 로딩하는 화면이 보이는가 싶더니 조회된 화면이 펼쳐졌다. 화면을 보자마자 마치 석고상이 된 것처럼 온몸이 굳어버렸다. 한동안 로또용지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아쉽다는 말이나 당첨이 되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짧은 숫자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봐야 알 수 있는 긴 숫자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엄청난 금액임을 확인한 후, 아래쪽에 당구공처럼 생긴 나열된 숫자들을 봤다. 여러 가지 색으로 동그라미 여섯 개가 나란히 모여 있었고 1등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길게 놓여있는 아라비아 숫자 위로는 축하한다는 메시지도 적혀 있었다.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앞자리가 2로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 이십억? 진짜?”
기다랗게 늘어선 숫자들을 세어보니 이십팔억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찬혁은 평소에 1등에 당첨되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길거리에 나가서 큰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거나, 미친 듯이 팔짝팔짝 뛰면서 온갖 요상한 춤을 추며 미친놈처럼 지랄발광을 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런 말도 몸짓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고성방가와 지랄발광은 몸속에서만 느껴질 뿐, 겉모습은 마치 수행하는 사람이나 도를 닦는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차분하고 평온했다.
“됐다! 됐어! 은미야 조금만 기다려!”
찬혁은 극도의 흥분으로 인해서 떨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간신히 부여잡고,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사서 흡연실로 갔다.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담배연기를 폐부 깊숙한 곳으로 빨아들인 뒤 길게 내뿜었다. 커피 맛도 담배 맛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오더니 찬혁의 옆에 앉았다.
“기분이 어때?”
찬혁은 여전히 멍한 상태로 고개를 돌려 기명이를 바라보았다.
“야! 진짜 됐어. 이거, 이거 됐다고.”
기명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짙은 슬픔이 묻어있었다.
“좋냐?”
“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당연하지! 안 그래도 막막했는데 이제 살았다. 이제 살았어!”
기명이가 담배를 입에 물고 멀리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럼 됐다. 그래도 넌 아직 은미 씨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보통 로또가 되면 혼자 차지하려고 난리들인데..”
“그럼 당연하지! 은미가 예민해지고, 애교도 없어진 거는 전부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지, 원래 그런 여자 아니야. 너도 잘 알잖아.”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그나저나 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신기하네... 너 이 자식. 정말 천사가 맞긴 맞나 보네.”
찬혁은 그제야 크게 웃으며 기명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나 기명이는 여전히 슬픈 표정으로 찬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찬혁아..”
“왜?”
기명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한숨을 몰아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라도 일단 익산으로 내려가! 그 공장에서 일하지 않아도 돼. 그냥..”
찬혁은 기명이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은미가 힘든 상황이란 걸 알잖아. 게다가 로또까지 된 마당에 나 몰라라 하라는 거야?”
“내가 말한 거 잊었어? 약속했잖아! 난 네 약속을 믿고 위에다가 어렵게 부탁을..”
“아, 아니야 됐어! 됐고! 미안한데 일단 잠깐 얼굴만이라도 보고 올게. 그럼 되잖아 응?”
“아니야, 안된다고!”
기명이의 고함소리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찬혁은 영문도 모른 채 기명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명이가 말을 이었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제발..”
“얌마! 너 능력 좋잖아. 이왕 인심 쓰는 김에 그 정도 힘도 못 쓰냐? 이거, 이거 천사도 별거 없구만!”
그 순간, 기명이가 찬혁의 멱살을 와락 잡았다. 기명이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얼마 동안이었을까, 두 사람은 그렇게 말 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기명이의 손이 스르륵 풀리면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도 너의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 운명은 도망가거나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웃으며 맞이하는 거니까. 그래! 친구로서 마지막까지 함께 하마. 잊지 마! 네가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같이 있을 거야."
“그래, 그래야 친구지. 걱정 마라 얼른 가서 얼굴만 보고 내려올게.”
“......”
찬혁은 서둘러 악수를 한 뒤,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기명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기명이는 휴게소를 벗어나는 조그만 경차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하늘 위 검은 구름은 점점 넓게 퍼져가고 있었다.
경기도 평택 부근.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고속도로 위의 차량들도 점점 속도가 줄어들고, 급기야 정체되는 구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찬혁은 은미를 만날 생각에 들떠있었다. 휴대폰을 스피커에 연결한 후, 자신이 좋아하는 록 음악을 크게 틀고 신나게 따라 부르며 운전을 했다.
“이야.. 이거 얼마 만에 듣는 음악이야! 이런 날씨에는 역시 록이지!”
스피커에서는 예전부터 즐겨 들었던 록 음악이 차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찬혁은 소리를 더 키우기 위해서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차 안은 흡사 라이브 음악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제법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할 즈음, 머틀리 크루와 건스 앤 로지스의 신나는 록 음악이 끝나고 레너드 스키너드의 록 발라드가 시작됐다.
Lynyrd Skynyrd (Free Bird)
If I leave here tomorrow,
Would you still remember me?
For I must be travelling on now,
There′s too many places I′ve gotta see.
(But) If I stay here with you, girl,
Things just couldn′t be the same.
′Cause I′m as free as a bird now.
And this bird you never change.
Oooh ooh ooh~~
And this bird you cannot change.
And this bird you cannot change.
Lord knows, I can′t change.
Bye bye, baby,
It′s been sweet love.
Though this feeling I can′t change.
Please don′t take it so badly,
′Cause Lord knows I must play.
내가 만약 내일 이곳을 떠난다 해도
당신은 여전히 나를 기억하실 건가요?
난 이제 여행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아직 둘러볼 곳이 너무나 많지요.
그러나 내가 만약 당신과 함께 여기 머무른다 해도
모든 것이 전과 같지는 않을 거예요.
난 지금 새처럼 자유로우니까요.
당신도 새가 되어버린 나를 절대 바꾸지는 못할 겁니다.
당신도 새가 되어버린 나를 바꾸지는 못할 겁니다.
당신도 새가 되어버린 나를 바꾸지는 못할 겁니다.
내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랍니다.
잘 지내세요, 그대여.
이 느낌이 바뀌진 않겠지만
그것은 달콤한 사랑이었답니다.
너무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말아 주세요.
내가 연주를 해야만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요.
찬혁은 내리고 있는 비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차분한 마음으로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며 콧소리로 따라 불렀다. 그러나 슬픈 가사였고, 레너드 스키너드 밴드 멤버들 역시 이곡을 마지막으로 비행기 사고 때문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생각나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런 날씨 분위기에 어울리긴 한데, 뭔 가사가 이 지랄이야.”
툴툴거리며 휴대폰에서 다시 선곡을 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 비가 오는 바람에 차량들은 서행을 하고 있어서 나름 안심했다. 왼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원하는 곡을 찾고 있었다. 서행을 하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차는 차선을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다.
‘빠 앙 빵~’
옆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량이 찬혁의 차를 가까스로 비켜갔다. 깜짝 놀라며 핸들을 급하게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경차는 잠시 휘청 거린 뒤, 미끄러지며 앞차와 추돌할 뻔했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찬혁은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다시 양손으로 핸들을 잡았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레너드 스키너드의 Free Bird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마 동안 운전에만 집중하며 가다가 길게 정체된 구간이 나오자, 잠시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운 뒤 빠른 손동작으로 휴대폰에서 음악을 선곡했다. 드디어 찾았다! 머틀리 크루의 홈 스위트 홈.
“그래! 집으로 가자!”
노래가 흘러나오고 후반부의 가사 부분에서 목청껏 따라 불렀다.
I'm on my way,
Just set me free.
Home sweet home.
난 집으로 가고 있어.
날 자유롭게 내버려둬.
홈 스위트 홈.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무심코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그 순간 찬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차 앞에서 기명이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며 바깥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 너 뭐야! 거기서 뭐해?”
찬혁은 당황하며 룸 미러를 쳐다봤다. 그때, 경차 바로 뒷 차가 커다란 윙 바디 트럭에 밀려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찬혁이 몸을 돌려 차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큰 충격과 함께 핸들에 머리를 부딪히며 몸이 눌려 버렸다. 찬혁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차가 점점 찌그러져가자, 깨진 차창 밖에서 기명이가 찬혁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려!”
기명이는 차 문을 뜯어내고 핸들에 상체가 낀 채 의식을 잃은 찬혁을 차 밖으로 끄집어내려고 힘껏 당겼다. 그러나, 찬혁은 찌그러진 차체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경차는 점점 더 앞으로 밀려갔다. 앞으로 조금만 더 밀려 간다면 찬혁은 압사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기명이가 기도에 가까운 외침을 뱉어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세요! 도와주신다면 저를 강등 시키셔도 좋습니다. 제발.."
"제! 발!”
그 순간, 찬혁의 상체가 바깥쪽으로 스르르 기울어졌고, 가까스로 차 밖으로 끄집어내자 조그만 경차는 더욱 작게 찌그러지며 앞으로 밀려갔다. 기명이는 정신을 잃은 찬혁을 찻길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러고는 찌그러진 차로 다가가서 찬혁의 가방을 챙겼다. 아비규환이 된 고속도로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 오고 갔고,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경기도 인근 병원.
기명이가 병원 응급실에 누워있는 찬혁 곁에 앉아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간호사가 다가왔다.
“환자분 보호자세요?”
“네. 이 친구 괜찮은 거죠?”
“자세한 건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아요. 지금은 혼수상태입니다. 안정을 취해야 해요.”
“아 네.”
“접수는 하셨나요? 접수 안 하셨으면 접수부터 하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찬혁의 팔에 꽂혀있는 링거의 조절밸브를 조정한 후 자리를 떠났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지정된 병실로 이동되었고, 찬혁은 미라처럼 머리와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있었지만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오후가 되자 회진을 돌던 의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기명이가 의사를 보며 목례를 하자 의사는 차트를 보며 찬혁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음.. 지금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앞머리에 충격으로 인해서 뇌진탕의 소견이 보입니다. 그리고 가슴에도 충격으로 인해서 갈비뼈에 금이 갔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부러지지는 않았네요. 조금만 늦었더라면 갈비뼈가 부러져서 폐를 다칠 수도 있었어요.”
“뇌진탕이면.. 심한가요?”
“글쎄요... 일단 의식이 돌아와 봐야 알겠지만, 자칫하면 시력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네. 감사합니다.”
의사가 자리를 떠난 후, 기명이는 찬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병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인천.
“혹시 박 찬혁 씨 아내분 되시나요?”
“네 그런데요.. 누구신가요?”
은미는 찬혁의 휴대폰 전화로 모르는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당황스러웠다.
“아 다행이네요. 여긴 평택 경찰서구요, 전 김 현수 경찰관입니다.”
“평택 경찰서요?”
“네, 마지막 통화 목록에 배 은미 씨가 아내분 같으셔서 전화드렸습니다.”
은미는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제 남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그런데 남편분이 보이질 않아서요. 차량 안에 휴대폰을 발견하고 연락드린 겁니다. 혹시 남편분에게 연락 없었나요?”
교통사고라는 말을 들은 은미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보세요! 괜찮으세요?”
“네, 그 사람이 없어졌다고요?”
“네 차 안에 없으시고 주변에 물어봐도 못 봤다고 하네요.”
“그게 도대체 무슨.. 그럼 어떡하죠?”
“일단 혹시라도 연락이 오거나 하면 바로 저희에게 전화 주세요.”
“네..”
전화를 끊은 후, 은미는 넋이 나간 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은정이 은미에게 다가왔다.
"엄마! 괜찮아?"
“아저씨가.. 교통사고가 났데.”
“뭐? 그래서? 지금 어느 병원에 있는데?”
“그게.. 없데. 사람이 없데. 안 보인데..”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없다니, 아저씨가?”
“응.. 사고 현장에서 사라졌나 봐.”
“그게 말이 돼? 어떻게 사람이 없어져? 누가 그래?”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 아저씨 휴대폰으로.. 휴대폰만 있고 아저씨가 안 보인데.”
“무슨 그런 일이... 일단 일어나 봐.”
은정이 은미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운 후 소파에 앉혔다.
“안되겠다. 내가 경찰서로 가봐야겠어.”
“이 시간에 어딜 간다고 그래. 연락 오겠지.”
“그렇다고 여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아이참, 그럼 나랑 같이 가.”
두 사람은 서둘러 준비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바깥으로 나오자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은미가 우산을 들고 택시를 잡으려 손을 흔들 때, 갑자기 눈알이 빠질듯한 통증과 함께 현기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엄마!”
은정이 끌어안고 이름을 계속불러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서둘러 119에 도움을 청했다.
“여기, 여기로 빨리 좀 와주세요. 우리 엄마가 쓰러졌어요!”
“신고자분! 진정하시고 위치를 말씀해 주세요.”
얼마 뒤 구급차는 은미를 싣고서 빗속을 뚫고 병원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