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화. 집으로..
인천 제물포역 앞.
늦은 저녁시간, 찬혁은 혹시라도 간신히 찾은 기억을 잊어버릴까 노심초사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 은미에게 들은 빌라 이름을 떠올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매달리듯 물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건물 이름만으로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중 누군가 찬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명이었다.
“기억을 거의 찾은 거 같네?”
“그래 그래, 기억났어. 그리고 은미도.. 그런데 집 주소는 몰라. 이름이 행복 캐슬이라는 것밖에..”
“음.. 전부 기억난 게 아니군. 지금 거기 가도 소용없어.”
“소용없다니 어째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어. 밤도 늦었고 일단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를 좀 하자.”
두 사람은 역사 인근에 위치한 횟집으로 들어갔다. 평일 늦은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가게 안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찬혁은 기명이의 뒤를 따라 들어가 창가 쪽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랜만에 너랑 이렇게 한잔하네.”
“그러게, 하지만 난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아. 도무지 뭐가 뭔지를 모르겠어.”
“꿈이라... 하기야 현실이 꿈일 수도 있고 꿈이 현실일 수도 있겠지. 뭐가 됐든 간에 이제는 좋게 마무리됐으면 좋겠다.”
“너도 지친 모양이구나?”
“그래 이젠 나도 이 짓거리 더 이상 못해 먹겠다. 특히 너! 넌 아주 피곤한 스타일이라.”
“뭐 어쨌든 미안하게 됐다. 이래저래 많이 도와줘서 고맙기도 하고.”
“됐어. 칭찬받자고 말한 건 아니야. 어차피 내 일이기도 하니까. 그건 그렇고 너 내가 준 가방은 잘 가지고 있지?”
찬혁이 꼬질꼬질하게 때가 묻은 가방을 얼굴 위로 흔들었다.
“이제 그걸 전해줄 곳을 알려 줄 거야.”
“어? 여기 뭐가 들었는데?”
찬혁이 가방을 열어서 뒤적거리며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명이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잠시 후, 찬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가방 안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가방 안에서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상태였지만 다행히 찢어지지 않은 로또 한 장이 있었다.
“어, 이거 로또 아니야?”
“.....”
“이거, 설마 1등 당첨된 거야?”
기명이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찬혁은 커져버린 눈 만큼이나 입이 쩌 억하고 벌어졌다.
“정말이야? 정말? 1등?”
“그래! 인마. 속고만 살았냐?”
“그렇지, 그렇지.. 천사는 거짓말 못하지! 와.. 이거 대박이네. 그런데 이게 여기 왜 들어있어? 설마 진짜 이게 내 거야?"
기명이가 대답 대신 미소를 짓자 찬혁은 입을 벌린 채 엉덩방아를 찧듯이 의자에서 연신 방방뛰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렇게 좋냐?”
“그럼 당연하지! 말이라고 하냐? 와 나한테도 이런 행운이 있었구나.”
“행운은 개뿔..”
의자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찬혁이 뭔가 생각난 듯 기명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참, 그나저나 아까 했던 말 자세히 좀 해봐.”
기명이는 찬혁의 빈 술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기명이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주기에 충분했다. 찬혁의 왼손은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 오른손은 가방을 꼬옥 움켜쥐었다. 이야기를 모두 끝낸 기명이가 맥주잔에 술을 가득 따른 뒤 단숨에 들이켰다.
“그날 익산에서 내가 아직은 올라가지 말라고 한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 첫 번째는 네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얼룩들이 자연적으로 사라질 시간이 필요했고, 두 번째는 각자 수호천사들이 관리하는 대상의 운명이 뒤틀릴때마다 방해꾼들의 꼬장이 심하기 때문에 그 힘을 제어 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인생에 대한.. 얼룩? 방해꾼?”
“그래. 내가 인간들이 가끔 한심하다고 말했듯이 그런 종류인 셈이지. 넌 너무 시간을 낭비하며 살았고, 자신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너무 무책임했어. 물론 나름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자기 연민일 뿐이야. 그리고 우리 세계에도 시기와 질투하는 자들이 있어. 우리가 수호하는 인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존재들이지.”
“악마.. 같은?”
“뭐 대충 비슷해. 머리에 뿔이 달리거나 해괴하게 생기진 않았어. 오히려 더 아름답고 멋지게 생겼지. 그게 그들의 무기 중 하나지만... 어쨌든, 그 당시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모든 게 꼬이고 얽혔던 거야. 그래서 니가 지금 이 고생을 하는 거고. 이제야 궁금증이 풀렸어?”
“그럼, 나 이제 다 끝난거야?”
“그게.... 한 가지가 남았는데 이게 좀..”
“뭔데 말 꺼낸 김에 빨리 말해줘!”
기명이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결심한 듯 팔짱을 끼고 힘을주어 말했다.
“은미 씨 말이야. 은미씨에게 용서를 받아야 해. 그래야 지금까지 지은 너의 모든 죄에 대한 결계가 풀려. 그리고 사악한 존재들도 물러갈 거구. 위에서 아무리 벌을 주려 해도 가족이 용서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거든. 그런데 쉽지가 않다. 이건 나도 예상을 못 한 일이라...”
“그렇구나, 괜찮아. 은미가 날 용서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동안 나로 인해서 고생했는데 은미만 무사할 수 있다면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을거야. 그런데 뭐가 쉽지 않다는 건데?”
“은미 씨 딸 말이야.”
“은정이? 은정이가 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속일 수가 없는데 거짓말을 하더라구. 뭐 그 마음이야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속이다니 뭘? 아 진짜 속 시원하게 좀 말해봐라!”
“그건 내가 직접 말하는 것보다 은정이한테 직접 들어. 그게 맞는 것 같다.”
“이 자식이 지금까지 기껏 말해놓고 짜증 나게..”
“어차피 집에 가면 은미씨도 볼 테니까. 직접 만나면 알게 될 거야. 너무 당황하거나 놀라지는 말고 알았지?”
“참내, 너는 변한 게 없구나.”
“하하, 내가 그런가? 자 어쨌든 마무리 잘 해. 그런데 한 가지만 주의해. 아직 이 사악한 놈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으니 조심해야 해. 혹시라도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솔깃한 제안을 해도 무시하고 무조건 나를 불러야해.”
“난 아직 사고 이후로 휴대폰도 없는데 어떻게 연락하라고?”
찬혁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기명이가 양 손바닥을 펼친 후 두 손을 겹치더니 얼굴에 가져다 댔다.
“이 상태로 눈을 가리고 나를 불러. 그럼 니가 부르는 걸 내가 알 수 있어.”
“이렇게?”
“그렇지. 이제 됐어. 자 그럼 일어날까?”
두 사람은 다시 만나자고 다짐한 뒤 헤어졌다. 찬혁은 기명이가 알려준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알려준 집에 가까워 질수록 작고 초라한 오래된 건물들이 모인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다. 찬혁은 이렇게 형편없는 곳에 은미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드디어 저만치 멀리서 보이는 허름하고 오래된 3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찬혁은 1층에 서서 눈짐작으로 층수를 세어 보았다. 드디어 거실창에 불이 켜진 집을 발견하자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다. 찬혁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공동현관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