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두통이 꽤 심하게 있다.
아침에 보통 수영이나 러닝을 하는데, 오늘 아침엔 두통과 어지러움으로 출근도 간신히 했다.
사실은 어제부터 은은하게 두통이 있었는데 무시하고 필라테스랑 러닝을 했다. 새벽수영까지, 운동 3개를 한 날. 가끔씩 폭주하는 성격 탓에 하루에 운동은 2개까지만 하는 걸로 규칙을 정해놨는데, 어제는 어겼다. 집에 와서 씻자마자 쓰러져서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두통이 계속 있어서 이런.. 좆됐네 싶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만성 두통이 너무 심했다.한번 두통이 시작되면 눈을 못 떴다. 눈을 뜨면 눈알이 빠질 것 같이 아팠기 때문이다. 잘 때는 아픈 걸 모르기에 계속 잠들기만을 기다렸고 일어나면 토하기를 반복했었다. 그때는 시도 때도 없이 두통이 와서 뭐가 원인이 되는지 몰랐는데,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바람을 쐬면 무조건 두통이 왔다. 엄마는 이것도 자기를 닮았다고 했다. 더운 여름에도 선풍기 바람 한 번을 쐬면 바로 두통이 시작되었다. 한의사들의 고전 같은 "상한론"이라는 책이 있다. 본과 1학년 때 처음으로 그 책에 나오는 계지탕이라는 약에 대해 공부할 때, 오풍惡風이란 표현을 만났다. 바람을 두려워한다(싫어한다)는 뜻이다. 상한론에 나오는 계지탕은 내상보다는 외감에 초점이 맞춰져 있긴 하지만 어쨌든 오풍이라는 표현이 딱 나를 위한 표현 같아서 감동했었다.
곁길로 좀 새자면, 한의사들이 사랑하는 <상한론>에 나오는 계지탕에 대한 설명이다.
제12조[013] 太陽中風, 陽浮而陰弱. 陽浮者, 熱自發; 陰弱者, 汗自出. 嗇嗇惡寒, 淅淅惡風, 翕翕發熱, 鼻鳴乾嘔者, 桂枝湯主之. 태양경병의 중풍의 맥은 양부이음약인데 풍사가 표에 있는 위기를 침범했으므로 겉으로 약하게 누르면 맥이 부하지만 동시에 땀이 새어나가고 있으므로 깊게 누르면 맥이 약합니다. 맥이 허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양부이음약 맥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많이 건강해진 지금도 두통은 여전히 내 친구지만, 이제는 거의 참을만하고, 언제 오는지 패턴이 예측 가능하다. 그리고 대처도 가능하다. (나의 두통은 타이레놀 같은 약은 잘 듣지 않는 편이다.)
1) 생리가 끝나갈 때쯤, 빈혈 때문에 두통이 온다. 보통은 격렬하지 않은 은은한 두통이다. 많은 경우 어지러움을 동반한다: 이럴 때는 그냥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철분제도 먹어봤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2) 내 소화력보다 많이 먹거나 밤에 음식을 먹고 바로 잘 때: 두통이 없어질 때까지 굶는다.
3) 전날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잡을 때 : 제일 괴로운 경우. 두통이 잘 안 없어진다. 몸이 시위하는 것 같다.
어제는 1번과 3번의 콤보였다. 아픈데도 무시하고 계속 운동을 했고, 일하면서도 계속 졸렸지만 점심시간에도 쪽잠을 자는 대신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글을 썼다. 어제 유난히 환자가 많아서 화장실 가는 것이 귀찮아서 물도 안 마셨다. 저녁도 귀찮아서 굶고 음료수로 대체하고 운동만 하고 잤더니 몸이 열받은 것 같다. 화가 날만 하다.
오늘은 몸에게 사과하는 날이다.
아침에도 죽을 챙겨 먹고, 물도 많이 마시려고 노력한다. 제가 진짜 잘못했습니다. 반성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오늘의 현실은 이모양 이꼴이지만... 현재의 나는 바람 따위는 두렵지 않다. 야외 러닝할 때는 일부러 바람을 실컷 맞는다. 과거의 나한테 보상을 주는 기분이다.
나는 이제 이런 사람이야.
바람도 두통도 지금은 무섭지 않아.
잘못하면 며칠 진심으로 사과하면 그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