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좋은 계절, 봄
어제저녁, 심심해서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S 원장님께 연락이 왔다.
이 세상에 별별 사람들이 다 있는 것처럼, 환자들 중에도 별별 사람이 다 있다. 나보다 동생인 S 원장님은 가끔 힘든 환자가 있으면 내게 투정 부리듯 이야기를 하고 나는 열심히 들어준다. 어제도 카톡으로 열심히 이야기를 하다가 답답했는지 전화까지 하셨다.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고 퇴근하고 러닝을 하러 우리 동네로 온다는 거였다. S원장님은 유산소 혐오자, 웨이트만 좋아하는 분이셨는데 러닝을?
나: "오! 언제 오세요?? 제가 같이 뛰어드릴게요ㅎㅎ"
S: "저는 페이스가 느려서.. 원장님 운동 안되실 텐데.."
나: "저는 그냥 뛰는 거면 다 좋아요! 그리고 러닝 마치고 커피 사드릴게요! 러닝 하면 스트레스 다 풀리니까 같이 뛰어요^.^"
저녁 6시 반쯤, 우리 동네에 있는 호수를 뛰기 시작했다. 2.8km 정도 되는 코스를 딱 한 바퀴, S 원장님의 페이스에 맞춰 8분대로 뛰었다. 원장님은 최근에 런데이 슬로우 러닝 유료결제를 해서 "라라"라는 AI 트레이너(?)랑 같이 뛴다고 했다. 뛰는 동안에 핸드폰에서 라라의 지시가 나오면 거기에 맞춰 걷고, 뛰고, 자세를 조정하기도 하는 프로그램이다. 원장님 환자 중 한 명이 이 프로그램으로 살을 많이 빼서 원장님도 자극을 받았다고.
나도 맨 처음에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런데이 앱으로 시작했었다. 그때는 내 영어선생님이었던 William이 달리기 앱을 사용해서 뛰면 좋다고 추천을 해줘서 그 앱을 쓰게 됐었다. 러닝을 많이 좋아하게 된 이후엔 앱을 쓰지 않고 그냥 애플워치만 차고 뛰었는데, 오랜만에 런데이 앱을 써보니 신선하고 좋았다. S 원장님이랑 별 의미 없는 농담 따먹기,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뛰니 엄청 재밌었다. 영원히 뛰고 싶은 느낌이었다. 라라가 지시하는 오늘의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는 너무 아쉬웠는데, S 원장님은 드디어 운동이 끝나서 좋다고 했다. 조금 서운했다.
나의 천골 상태는 아직도 좋지 않다. 골절면을 만지면 아직도 통증과 부종이 있고, 더 황당한 건 L4-5 사이의 추간판이 조금 bulging 상태가 되어 신경근을 누르고 있는지 운동을 심하게 하면 간헐적으로 우측 엄지발가락과 종아리 외측면으로 저림이 온다. 아무래도 천골 움직임이 부드럽지 않아 주변 요추에 부담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어제 달리기를 아주 느림보처럼 했는데도 저녁에 살짝 다리가 저렸다. 허허. 어쩔 수 없지.
그랬음에도... 오늘 아침엔 어제의 달릴 때의 즐거움을 또 맛보고 싶어서, 일찍 출근해서 한의원 뒤편 공원을 뛰었다. 혼자 뛰니 어제 S 원장님과 뛸 때 보다 나도 모르게 빨리 뛰고 있었다. (바보야 안됏!) 그래도 참 기분이 가벼웠다. "행복"이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달릴 때의 그 고요한 기쁨, 그것이 행복에 가까운 느낌이 아닐까? 매일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인 걸까?
한의원 뒤 공원은 사실 러닝하기에는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달려본 적이 거의 없다. 나는 직선코스를 선호하는데 그 공원은 300m 정도밖에 안 되는 동그란 코스다. 근데 오늘 뛸 때 자세히 보니, 나름 오르막 코스도 있고 해서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찬 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다른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으면 아무 곳에서나 뛰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매일 러닝용 브라와 러닝슈즈, 레깅스를 평상복으로 입고 다녀야겠다. 여력이 있으면 아무 데서나 뛸 수 있도록.
게으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나는 사는 게 무겁게 느껴지고 귀찮을 때가 많은데, 이렇게 작은 재미들을 하루에 듬성듬성 배치해 놓고 그 재미에 몰입하면 어쩐지 모든 것이 좀 더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빨아먹기 아까운 사탕을 천천히 핥아먹듯, 오늘의 달리기의 맛을 할짝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