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팽압을 기다리며
돌이켜보면, 자라면서 엄마한테 참 별것도 아닌 걸로 시비를 걸었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건 무조건 싫어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엄마는 꽃을 좋아했다. 나는 엄마한테 꽃이 뭐가 예쁘냐고, 꽃보다는 나무가 예쁘다고 딴지를 걸기 일쑤였다. 어렸을 때부터 어딘가 이상했던 나, 심지어 이런 말도 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 아니야? 징그러워."
곱고 고운 나의 엄마. 나 때문에 얼마나 복장이 터졌을까.
하지만 내가 꽃보다 잎이 무성한 나무들을좋아한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꽃이 지는 모습이, 그리고 그 연약함이 아름답지 않았다. 싱싱하고 잎이 무성한 나무, 그 싱그러운 생명력을 나는 사랑했다.
그런데 이제야, 그 연약한 것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집 근처에 개나리가 만개했다. 이 연약하고 고운 꽃, 얼마나 갈까. 길어봐야 고작 열흘일 텐데, 그 열흘을 위해 겨우내 애를 썼구나. 나는 앞으로 몇 번의 개나리를 더 볼 수 있을까.
엄마는 이런 걸 다 알고 꽃을 좋아하셨을까? 내가 못된 말로 엄마를 괴롭힐 때, 엄마는 나처럼 삼십 대였다. 우리 엄마, 고생을 많이 해서 일찍 철이 들은 것일까? 엄마랑 함께 할 수 있는 봄은 몇 번 남았을까?
개나리가 다른 꽃보다 먼저, 그것도 잎을 틔우기 전에 꽃부터 틔우는 것도 생존 전략이다. 잎에 가리지 않은 꽃이 곤충들에게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겨우내 줄기에 저장한 녹말은 딱딱한 상태인데, 봄비가 내리면 이 녹말이 작은 분자인 포도당으로 변해 각각의 꽃눈으로 전해진다. 봄비는 나무가 맞는 거대한 수액주사라고 볼 수 있다. 꽃눈 안에는 미리 만들어둔 꽃잎들이 차곡차곡 접혀있다. 꽃망울이 터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실 영양분보다는 "팽압"이다. 봄비가 내려 세포 속 액포에 물이 꽉 차면 비로소 그 팽압이 발생한다. 물의 압력으로 인해 꽃잎이 쫙 펴지는 것이다. 그래서 꽃이 피는 건 성장이기보단 팽창이다. 저장된 양분이 아무리 많아도, 비가 오지 않으면 꽃이 피지 않는 이유다.
겨우내 죽은 것 같아 보이는 나무들, 사실 그 안에서는 온갖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겨울에 나무들은 가을에 만들어둔 꽃눈의 세부 디테일을 짜고, '저온 요구도'를 충족 중이다. 신기하게도 식물들은 일정한 시간의 지독한 추위를 겪어야 "겨울이 끝날 때가 됐구나" 하는 생체 시계가 작동한다. 그래서 추위는 나무에게 단순한 고난이 아닌 꽃을 피우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다.
사람의 계절도 겨울일 때가 있다. 결실 없는 계절,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계절. 그러나 사실은 양분을 저장하며 추운 시간을 쌓고 있는 중일지도. 팽압을 가져다줄 줄 봄비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