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토지'-박경리
박경리 작가의 역작 '토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주인공 격인 길상과 서희의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별당아씨와 구천이(환이)의 금지된 사랑. 월선이와 용이의 평생에 사무친 사랑, 오가타와 인실의 국적을 뛰어넘은(혹은 좌절된) 사랑, 강포수의 귀녀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 김두수(거북이)의 심금녀에 대한 병적인 집착..
그중 오늘은 소설 후반부에 짧게 등장한 "몽치"와 "모화"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몽치"는 사당패의 아들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시신 옆에서 밤을 새우고 늑대소년처럼 살아간다. 어릴 때의 경험 때문인지 세상 무서운 것 없는 성질에다 독특한 교육까지 받아 카리스마 있는(자기 주관이 강한(?)) 남자로 성장한다. 어부로서 통영에 정착한 후, 모두의 반대를 이기고 연상의 과부 모화와 결혼한다. 징용을 피해 도망 온 사람들을 보호하다가 체포당해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한다. 산사람들과 합류하여 지리산의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나무위키에 제 설명을 버무렸습니다.)
"모화"는 몽치 입장에서는 가난하고 지지리 궁상스러운 '애 딸린 연상의 과부'이다. 전남편의 착취와 행패에 못 견뎌 홀로 어린 아들과 노모를 부양하며, 평범한 술집도 아닌 밀주집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그래서 주정뱅이들에게 행패를 당하기 일쑤. 평범한 외모에 무뚝뚝하고 접대조의 애교 따위는 일절 안 하는 성미다. '성깔이 대단하고 비루한 짓은 죽어도 못하는' 모화는, 진상 손님에게 부엌칼을 들이대고 눈빛에서 살기를 뿜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몽치의 느닷없는 청혼에 자신은 남자에게는 질려버렸다 하여 거절했지만 앞날의 막막함과 몽치의 끈질긴 대시에 결국 정식 결혼한다.(나무위키에 제 설명을 더 많이 버무렸습니다.)
봉건 제도와 인습이 여전히 펄펄하게 살아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총각' 몽치는 '헌 계집'인 모화를 아내로 선택한다. 이유는 그저 '좋아해서.'
모화는 몽치가 청혼했을 때, 자신은 '애 딸린 계집'이라고 거절한다. 그러면서도 혼자 힘으로 살기 힘드니까 정 그러면 '기둥서방이라도 해달라'며 못 이기는 척 몽치의 청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결혼 이후 모화는 내내 몽치와 몽치의 주변인들에게 몸 둘 바를 몰라한다. 몽치의 아이를 임신한 후에도 그렇다. 그녀는 몽치 주변의 사람들을 피하려고 발버둥 친다. 그들을 볼 면목이 없어서다.
모화는 여성스러운 성격이나 외모가 아니다.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몰래 술을 만들어 (남자들에게) 파는 방식으로 늙은 엄마와 어린 아들을 부양하는 거칠고 강인한 여성이다. 그녀는 자존감도 낮다. 몽치의 청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면구스러워한 것을 볼 때, 스스로를 여성으로서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몽치는 대체 모화의 어떤 면이 좋았을까? 몽치에게는 다른 여자를 만날 기회도 많았었는데.
흔한 소녀답게(?), 나는 어린 시절부터 늘 '궁극의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어릴 적 내가 상상한 궁극의 사랑은 한 점 흠이 없는 완벽한 왕자와 공주의 사랑이었다. 안팎이 아름다운 왕자와 공주가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결말.
그러나 커갈수록 궁극의 사랑이란 상대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변함없이 깊이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결점이란 때로는 세상에서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을 만큼 어두운 것일 수도. 인생 밑바닥을 구르는 상대방에서도 사랑할 구석을 찾아내고, 거기에 반하고, 흐르는 시간에도 지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지켜내는 것.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차이. 이런 비밀을 깨닫고, 나는 줄곧 기다렸다. 비틀리고 어두운 나의 심연마저 영원히 사랑해 줄 단 하나의 궁극의 사랑을.
책 속에서 몽치와 모화는 짧게 묘사된다. 그러나 나는 습관처럼 묘사된 것 이상의 이야기를 읽어낸다.
몽치는 모화를 분명 정말 많이 사랑했을 것이다. 모화의 아들과 엄마에게도 잘했겠지. 둘 사이에 태어난 딸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모화가 나이 들어 추해지고 못생겨져도, 백년해로했을 거고.
모화는 그런 몽치에게 미안해하면서 더 잘해주고 섬기고 위해주었겠지.
강단 있고 억척스러운 모화는 몽치 앞에서는 들꽃처럼 여린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시신 옆에서 밤을 지새우고 늑대 소년처럼 자라난 몽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궁극의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인가 보다.
타인의 시선이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안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 혹은 그런 용기.
나도 그런 집중력과 용기를 가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