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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Nov 10. 2021

마흔,여행을 통해 새로운 눈을 갖는다

오래전 써 놓은 글을 다시 읽다 보면 깜짝 놀란다. ‘정말 이 글을 내가 썼단 말이야’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다 고치고 싶은 글도 있고, 내가 썼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쓸만한 문장도 있다. 그때의 감정과 기분 등 기억나는 게 없다. 어떤 글은 그 글을 쓸 때 마셨던 맥주의 종류까지 생각나지만 어떤 글은 내가 썼는지조차 의심이 되는 글도 있다. 시키지 않은 일도 척척 잘 해내는 뇌가 제 맘대로 내 기억을 마음대로 오리고 붙이고 배경음악까지 깔아 편집해버린 것이다. 기억해내야 할 일은 어디에 숨겨 놓고 못 찾는지 모르겠다. 꼭 내방처럼 뒤죽박죽 정신이 없는 것 같은 뇌는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있다.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공을 들여 편집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어디에 뒀는지도 모르게 처박아 둔다. 문제는 공들여 저장한 기억들까지 기억이 나지 않는 데 있다.

 

여행하는 동안은 모든 일들이 현재 진행형이다.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 순간을 즐기면 그만이다. 차갑게 식어 나온 기내식을 먹고,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고장 나고, 가이드가 늦잠을 자서 약속시간에 늦게 나타나고, 대낮부터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아무에게나 인사를 하고, 앞이 보이지 않게 들어찬 맹그로브 숲에 숨을 멈춘다. 여행의 모든 순간을 현재의 나로 경험하는 것이다. 여행 오기 전의 삶에 대한 어떤 후회도 사라지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불안도 걱정도 잊는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뭔가를 잘 해내려고 자신을 쥐어짜지 않아도 된다.

 

여행 중에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집에 돌아와서야 제 힘을 발휘한다. 그때부터 뇌는 아주 바쁘다. 오려내고, 붙이고, 배경음악도 넣고 자막까지 넣으려면 정신이 없다. 내 생각대로 풍경을 편집하기도 하고 경험이 내 생각을 제단하고 편집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생각과 느낌이 새로운 나를 만들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여전히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하지만 마흔 언저리의 여행은 지나가버린 과거와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자신을 현재에 존재하도록 납치한다. 영화 “졸업”에서 벤자민이 엘레인 손을 붙잡고 빠져나오듯 여행은 온갖 걱정거리들과 불안으로부터 나를 끌어낸다. 여행 중에 현재에 집중하며 느낄 수 있는 모든 자극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오래전 다녀온 여행을 떠올리면 여전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네모 반듯한 사각형 프레임 속에 담겨 해맑고 웃으며 오른손으로는 브리를 그리고 있는 나는 배경만 다르고 표정은 모두 똑같다. 그 웃음 밖의 순간들은 기억에 흐릿하게 존재하지만 그 작은 프레임은 희미하게나마 기억을 소환한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인물에만 초점을 둔 사진을 찍었다면 마흔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배경도 찍고 하늘도 찍고 나무도 찍고 꽃도 찍는다. 여행 중 찍은 사진첩에 저장된 꽃 사진만 1000장은 족히 된다. 모두 비슷비슷한 꽃 같지만 함께한 사람이 다르고 날씨가 다르고 공기가 다르고 무엇보다 그 꽃을 찍고 있는 내가  다르다. 그래서 그 사진들에 메모를 잊지 않는다. 뇌는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예쁘게 편집할 테니 지금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편집해 놓는다.

 

마르셀 푸르스트는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라고 했다.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의미 있는 경험들은 자신의 생각이 되고 가치가 되어 자연스럽게 삶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마흔의 여행은 꼭 많은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과거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날 데리고 나와 현재에 집중하도록 자꾸만 손을 내미는 것이다. 현실 속에 존재하고 싶은 나는 그 달콤한 꼬임에 자주 모른 척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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