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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Nov 19. 2021

마흔,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거절하기

나는 착하지 않다. 하지만 착한 사람이고 싶고 착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착하지 않은 사람이 착한 척을 하며 살려니 삶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착한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는 상황 파악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왜 저 사람이 화가 나있지? 왜 저 사람이 웃지? 왜 저 사람이 힘들어하지?’ 혹시 그 사람이 나 때문에 화가 나있고 힘들어하는 것은 아닌지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해야 한다. 그래야 가서 기분을 풀어줄 수 있다. “미친 거 아냐?”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내 행동들이 미친 짓인 것 같다. 아니 미친 짓이 맞다. 왜 그들의 감정을 내가 처리하려고 했을까? 왜 그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고 했을까? 이렇게 자신을 책망하고 질책하며 눈치를 보며 살았으니 무슨 수로 좌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감정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정확히 말하면 착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나를 억누르는 것을 인식했다. 타인의 만족을 위해 나를 괴롭히고 희생시키는 모습을 알게 되었다. 착하게 사느라 애썼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는데 눈물이 났다. ‘너 왜 그렇게 사는 거야?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었던 거야? 왜 그랬어? 그렇게 살아보니 어때? 행복해? 좋아?’ 마음속의 나는 쉬지 않고 속상한 마음을 쏟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에 무너져 목 놓아 울었다. ‘애썼어. 고생했어. 이제는 그렇게 살지마.’

 

마흔이 될 무렵, 마음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혼을 내기도 하고 위로를 하기도 하며 자신을 드러냈다. 마음이 말했다. 너의 친절이 누군가가 너를 함부로 대하는 계기가 되게 하면 안 돼.’ 어느 순간 나의 친절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나의 거절은 무례함이 되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좋아? 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어? 맘이 편하니? 왜 그렇게 말해?” 나는 늘 그렇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언제나 평화를 지켜내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도 아니다. 마흔을 살아내고 있는 나는 더 이상 피스메이커(peacemaker)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젠 남들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내 삶의 평화를 위해 나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다.

 

거절은 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아프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온다. 도저히 내가 책임질 수 없는 것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관, 그리고 내 삶의 목표나 방향과 같지 않을 때는 과감하고 확실하게 거절해야 한다. 과감하지 않으면 시간이 나타나 내 용기를 빼앗아갈지도 모른다. 확실하게 거절하지 않으면 미안한 마음에 또 한 번 발목을 잡힐지도 모른다. 빠르고 정확하고 확실하게 거절하는 과정 속에서 진짜 내가 되는 시간을 느끼는 것이 마흔이 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다.

 

 거절하지 못하고 착한척하며 마음 편한 것보다 용기 있게 거절하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더 나다워지는 과정이라면 나는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불평 없이 그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용기 있는 내 거절은 내가 내 모습을 결정하는 마흔의 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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