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어렸을 때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이란 영화를 여러 번 봤다. 두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매일 하늘에서 내렸으면 좋겠다며 법석을 떨었다. “음, 엄마는 곱창과 함께 소주 비가 내리면 좋겠다.”라고 장단을 맞춰주면 좋으련만. “하늘에서 하루 종일 음식이 내리면 지구는 삼일 안에 멸망할 거야.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만 말해도 지구는 음식에 묻히고 말겠지.” 뜨헉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가끔 장난을 치곤 했다. 영화를 즐겁게 보는 아이들 곁에서 나는 다른 상상을 한다. ‘하늘에서 돈이 우리 집에만 내린다면’ 모두에게 돈비가 내린다면 그 돈은 음식만도 못한 것이 될 테니까. ‘하나님, 듣고 계시죠? 저에게만 돈뭉치를 내려주세요.’ 특별히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삶을 통해 더 큰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시길 바라신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하늘에서 돈이 비처럼 쏟아지는 꿈을 꾼다.
나는 속물이다. 돈을 좋아한다고 표현하기엔 조금 부족하고 돈을 사랑한다. 마흔의 자존이나, 마흔의 상념들, 마흔의 우정, 마흔의 사랑, 마흔의 품격을 논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글을 쓴답시고 카페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도 마셔야 하고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고 싶으면 밥 한 끼 정도는 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마흔, 돈 들어갈 데가 너무 많다. 집의 반은 은행 지분이니 매달 꼬박꼬박 이자를 내야 하고, 커가는 아이들에 맞춰 교육비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매달 경조사비는 왜 그렇게 많은지 남들 다 한다는 주식투자나 노후 연금은 꿈도 꾸지 못 한다. 그러므로 우린 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았어도,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하루 뭉개고 싶어도 '나가자 일터로 우리에겐 빚이 있다.'는 슬로건을 상기하며 몸을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불안이 자시을 성장시켰다는 어느 작가의 고백을 들었다. 하지만 나를 성장 키고 발전시키는 것은 빚이었다.
마흔, 나는 부자인가? 사람들은 연봉이 1억이 넘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자가 되기 위해선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니?' 얼마가 있으면 부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은 얼마가 더 있어야 부자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10억~100억이라고 답했다는 뉴스를 봤다. 이제 로또 한 번 당첨으로는 부자가 될 수도 없다. 정말 하늘에서 돈뭉치가 떨어져야 할 판이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를 더 가지면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게 될까?
마흔, 질문이 많을 나이다. 그래서 스스로 질문해본다. '나는 가난한가? 나는 써야 할 곳에 돈을 쓰고 있는가? 쓰지 않아도 될 곳에 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이들이 어릴 때 아이들과 마트에 가면 아이들은 장난감 코너에서 발을 떼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묻곤 했다. “이게 정말 필요한 거야?” 아이는 눈물을 그렁거리고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젓는다. “세 번 더 생각하고 그래도 갖고 싶으면 그때 사자. 알았지?”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은 갖지 못한 장난감 때문에 울거나 화를 낼 것 같지만 또 다른 것들이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장난감이 진짜 필요한 게 아닌 것이다. 지금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그게 꼭 필요한 거야?’ 돈을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 돈을 스며 때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기 위해 애를 쓰며 돈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나는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며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며 드라마에 나오는 캔디 캐릭터로 착각하며 살았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가난한 나는 참고 또 참고 견디는 게 당연해.’ 그러나 마흔, 상대적 가난이 있다면 반대로 상대적 부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부자가 되어보기로 한다. ‘나는 부자다.’라고 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건 뛰어난 미모와 돈 밖에 없어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의 이런 외침을 웃어넘긴다. 하지만 그렇게 외칠 수 있기까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나의 객관적 빈곤을 감당할 수 있는 마음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프고 삶에 지쳐 있을 때 나에게 웃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더 크게 울어도 된다고 말해준 나의 동백이. <동백꽃 필 무렵>은 나를 위로했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옹산의 언니들의 의리, 어린것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사랑, 똑같이 어린것을 혼자 키우며 자존감을 키우는 동백이 그리고 그런 모자의 모든 것을 품는 용식이, 그런 용 식가 사랑하는 여자와 아들까지 품는 용식이 엄마 좋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든든했던 장면이 있다. 강종렬이 동백이에게 내민 ‘마술 항아리 같은 오백만 원 통장’이다. 아무리 써도 다시 오백만 원이 되는 마술 같은 통장. 기도의 제목이 바뀐다. ‘하나님, 하늘에서 돈이 내리지 않아도 좋으니 “무한리필 오백만 원 통장”을 갖게 해 주세요.’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삶을 통한 나의 행복을 바라시는 것 같다. 여전히 나의 통장 잔고는 그대로인걸 보면.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법정 <무소유>
마흔, 돈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이. 돈의 무서움도 알고 돈을 경계해야 함도 안다.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 커지는 것은 만족감이나 행복감이 아니라 불안과 집착 그리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소유하지 않으므로 채울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나이, 마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계속 없다. 어쩌면 돈은 계속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가진 게 뛰어난 미모와 돈 밖에 없는 부자가 되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