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모녀의 합의점
어릴 적, 바쁜 엄마의 장기 출장을 따라갔다.
한 달 여정도 되는 일정이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그렇게 가깝게 엄마랑 단 둘이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 처음이었기에, 그리고 단 둘이 어딘가 멀리 가는 것도 처음이었기에, 마음이 살랑살랑 설레었다.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던 여행에서 나는 처음으로 오랜 시간을 같이 옆에서 보내게 된 엄마와 삐걱이는 일들이 발생했다. 아마 단 둘이 시간을 보낼 줄 알았는데, 거기서도 엄마가 다른 사람들을 챙겨야 하고 바쁜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 못내 서운했던 것이었다. '엄마 독점욕'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린 마음에... 엄마를 빼앗긴 느낌이었다. 낯선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엄마에게 기대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커졌던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어린 마음에 못내 서운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때 왜 삐죽거리고 불편해했는지 물었는데. 그 속마음을 다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엄마가 내 점심 도시락을 매일에 가깝게 싸줄 수 있던 시간이 주어져서, 그게 너무 기다리던 시간이었는지 더 달고 더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아직도 작은 샌드위치와 달콤한 체리가 곁들여졌던 도시락의 맛이 아른거린다.
'엄마, 그만 바쁘고 나랑 놀아요.'
라고 솔직하고 정확하게 마음을 말할 수 있었던 어린이 었다면 그렇게 답답하지만은 않았을 텐데, 내내 삐죽이고 삐그덕 대는 것으로 미숙하게나마 내 마음을 표현했던 것 같다. 가까워졌는데 바쁜 엄마 옆에 있는 것이 못내 서운했고 차라리 이럴 거면 다른 집에 가겠다고 말했다.
어느덧 한 달이 지났고, 라벤더가 가득한 농장으로 가게 되었다. 아로마테라피스트에게 그 향기가 추출되는 식물과 추출 과정을 보는 경험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드넓은 초원에서 앙떼들이 '메에'하고 울고 뛰어다니고 보랏빛 그득하게 물든 대지가 보였다. 초록이 가득하고 화창한 하늘 아래에서도 석양이 지고 불그스름한 하늘이 물든 하늘에서도 보랏빛 라벤더 밭은 영롱하고 아름답게 반짝였다.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라벤더 농장 주인이 집으로 초대했다. 뉴질랜드 가정식이란 것을 처음 먹어봤다. 신선한 채소와 신선한 올리브유가 곁들여진 싱그러운 샐러드, 그리고 진한 치즈향이 풍미가 있었던 키쉬파이는 아직도 아른거리는 맛이다. 그렇게 신선한 샐러드와 키쉬파이는 지금껏 먹어보지 못한 것 같다. 농장 주인이 막 밭에서 따서 만들었으니 그럴 수밖에. 기억에 길이 남는 뉴질랜드 백반을 얻어먹고, 주황빛으로 물드는 노을이 지는 라벤더밭을 바라보았다. 뭉근하고 보드라운 라벤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서운했던 마음이 포근하게 달래졌던 건... 그날 맡았던 라벤더 향기가 가득한 꽃밭 내음 때문이었을까?
많이 삐걱거려서 걱정했다는 엄마의 우려와 달리,
뉴질랜드의 기억은 생각보다 좋게 남아있다.
라벤더 향기는 '양육'의 향기이다. 다른 이를 챙겨야 하는 양육의 스트레스일 수도 있고, 기대고 챙김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켜져서 생기는 스트레스로 마음이 힘들어졌을 때, 그 모든 책임감이나 기대감에서 해방되어 스스로를 돌보는데 도움을 주는 향기이다. 책임감에 겨를이 없는 엄마에게도, 돌봄 받고 싶은 나에게도 꼭 필요한 향기였다. 라벤더 향기가 잠을 솔솔 들게 한다는 건, 오롯이 스스로를 돌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도움을 주기에 그러하다.
그날, 그때 두 모녀에게 가장 필요한 향기였던 듯하다. 삐걱거렸던 엄마와 딸의 오랜 장기 여행에서 나쁜 기억으로 기억되지 않았던 것은.. 몽글몽글한 기억으로 기억되는 것은 라벤더 향기가 도와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라벤더
내가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감에, 돌봄을 받고 싶다는 바람에 괴로운 적이 있지 않은지..
누군가의 엄마가 되기를 관두고, 누군가의 아기가 되기도 관두고
오늘만큼은 내가 나를 돌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