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나 진짜 사랑하는 거 맞아?'라고 지나치게 물어보고 있다면, 아니면 '사랑해 줘요'라고 끝없이 요구하고 있다면 그건 아마 스스로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인지 그게 헷갈려서 자꾸만 물어보고 싶은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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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그거 다른 사람한테 안 물어봐도 되는 거 알지?
있잖아.
이 세상에 온 걸 환영해.
그냥 이곳에 온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너무 부단히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너는 있는 그 자체로 사랑스러워.
무리해서 남한테 맞춰주지 않아도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니까
'사랑받을 자격'이란 거에 너무 목매달지 마
누군가 너에게 생체기를 낼 수는 있겠지만, 네가 그걸 허용하지 않는 이상,
그 생체기가 네가 사랑받을 자격까지 흠집낼 수는 없는 거니까
그 누구도 흠집 낼 수는 없는 거야.
그걸 꼭 기억해
네가 이 세상에 온 것만으로 너는 그 자격이 충분하단다.
환영해
-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쓰는 편지-
부단히,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 어떤 '자격'이란 것에 지나치게 애쓰며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 어쩌면 그 시간 동안 내 곁에 사랑이 다가와있었을지 모른다. 그저. 눈치를 못 채고, 설마 이걸 내가 받아도 될까? 이걸 줘도 될까?라고 망설이는 사이. 그 연약하고 보드라운 감정이 사사삭 하고 자취를 감췄을지 모르겠다.
미안해요
사랑해요
고마워요
상대가 받아들일지 말지 걱정하기보다. 사랑받을 자격을 걱정하기보다.
내 마음을, 내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자유로워지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사랑할 자격, 사랑받을 자격인 듯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자격'이라는 단어에서 해방되어 진짜 자격이 생기는 과정인 듯하다.
무한히 주어도 아깝지 않고, 더 줄게 넘쳐나는 마음.
받아도 죄책감 없이 '내가 이럴 자격이 될까?'라는 생각 없이. 감사하고 충만하게 받는 마음.
로즈가 전하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비단 연인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 친구들 사이 모든 관계에서 주고받는 사랑의 형태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랑의 형태는 굉장히 다양하다.
'이런 형태의 사랑 이어야 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해로운 행동이다. 사랑을 주는 방법이 다양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형태로 주세요.'라고 이야기해 봤자. 그는 그가 아는 형태로 줄 테니, '아니야' 그거 사랑 아니야~'라고 매몰차게 다른 모양을 밀쳐내지 말자. 동그란 모양도, 세모난 모양도 있다는 것을. 네모 모양이라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기보다, 서로의 이해가 부족했음을 받아들이기. 상대가 원하는 모양과 줄 수 있는 모양 사이에서 그 간극을 좁혀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보기로 한다.
사랑을 줄 때는, 그가 줄 것을 계산하지 않고 충실한 마음으로 준다. '진심으로, 너를 위해~'하는 마음으로 준다. 주는 데 있어서 행복하고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더 줄 마음이 또 차오른다.
로즈
똑똑, 너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마음의 벽을 녹여보기
로즈를 향기의 여황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모든 것들을 녹여낼 수 있는 강력한 사랑의 에너지를 가진 식물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무한경쟁의 시대에 내몰려서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일들을 겪은 것 같다. 현재의 2030 세대는 어쩌다 태어나서 눈을 떠보니, 마치 오징어 게임 같은 사회적 판에 플레이어로써 잔인한 게임을 시작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노력하면 그다음에 이만큼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보장되지 않은 확률게임의 판에서, 오늘의 누릴 행복은 내일로 잠시 미뤄두라고, 암암리에 세뇌당하면서 말이다.
흔히들 말하는 '스펙 쌓기'라는 말이 취업시장에서 쓰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판이 얼마나 잔인한 판인지 깨닫게 된다. '스펙'은 영어권에서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니다. Specification의 준말인 Spec(스펙)은 기계 가전제품의 화면, 해상도 등 을 설명할 때 쓰는 단어다. 취업 시장에서 사람을 설명하는 '저는 열정적이고, 공감능력이 좋습니다' 따위의 나를 표현하는 추상적인 설명 말고, 나는 이런 학교를 나왔고, 저런 자격증이 있고, 무슨 활동을 했고 등의 객관적 수치로 표현하기 좋은 '나'를 시장에 팔기 좋은 물건으로 잘 포장하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오징어 게임 같은 과열 경쟁에 내몰렸다. 누군가는 이런 게임에서 승자가 되었고 그들의 판에서 누군가는 나에게 '패자'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그 오징어 게임 판을 내가 짜지 않았으니, 내가 굳이?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취업, 결혼, 집, 재산 등등 남들이 정한 그런 '자격'말고, 남들이 짠 판 말고, 내가 어떤 판에서 행복한지 결정하겠다는 조용하고 단호한 혼자만의 선언을 하고, 그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나는, 요즘 조금 더 행복해졌다.
그리고 지나갔던 나의 연애사를 돌이켜보니... 어쩌면 나는 내가 어떨 때 제일 행복한 사람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는 막연히.. 흔히들 말하는 이런 스펙(?)의 사람과 결혼해야 해!라는, 누군가 정한 보편타당한 조건에 세뇌당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당연히, 내 옆에 누가 와야 하는지 모를 수밖에. 그리고 내 옆에 오는 누군가가, 내 행복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던 미숙한 시간도 어느덧 지나온 듯하다. 그리고 지나치게 모든 걸 혼자서 책임지려 했던 미숙한 시간도 어느덧 지나온 듯하다. 내 행복에 대한 책임도, 내 불행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질 수 있다는 걸, 예전에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내 행복에 대한 책임을 요구해보기도 하고, 아니면 체념하고 포기해 버리고 지나치게 혼자 많은 것을 감당하려고 했던 시간도 있었던 듯하다.
오늘 나의 행복을 오롯이 책임질 수 있다면, 내 행복이 내 옆 사람에게 스며들 수 있는 것을...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오늘 나의 행복을 책임지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요즘. 이제 조금은, 내 옆에 누가 와야 할지도 알 듯하다. 그건 바로...
혼자 행복할 수 있고, 같이 행복할 줄 아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