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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양이 CATOG Sep 08. 2023

제라늄. 완벽과 허술함 사이

부족함을 기댈 친구가 있다는 것. 기댈 수 있는 내가 된다는 것

잠시 일본 여행을 갔다. 

스물여섯, 교통사고 이후 잦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오랜 시간 동안 친구들과의 여행은 꿈도 못 꿨다. 친구들에게 피해가 될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 최근 들어 건강이 많이 호전되어 문득, '이 정도면 함께 여행을 떠나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찾아왔다. 계획형 친구들이 많았기에, 숙소를 미리 검색하고 예약하고, 맛집, 여행지를 검색하고 예산을 책정했다. 시간대 별로 여행 코스를 계획했다. 우리는 놀랍게 엑셀 파일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나는 숙소를 예약하고, 여행사 상품을 가격별로 비교하고 모든 친구들의 여권 및 서류를 취합해서 여행사에 보냈다.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자, 나의 허술함이 부각되는 일들이 생겼다. 스스로의 모습을  CCTV로 멀리서 볼 수 없으니, 내가 허술해질 때 어떻게 바뀌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하루 정도를 함께 보내니, 한 친구가 이야기했다.  


'네가 왜 자꾸 다치는지 알 것 같아.'

'응? 왜?'

'보니까, 배터리가 빠르게 방전되는 것 같아.' 


그 친구는 넘어질까 봐 평소 바닥을 보고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급속도로 피곤해져 버리는 나의 모습을 보고 '배터리가 빠르게 방전된다'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피곤해지면 여기저기 부딪히고 반응 속도가 급격히 느려진다고... 집중을 안 한다기보다는... 지나치게 집중하다가 그 친구에 따르면 

'절전모드'로 바뀌고 시야가 좁아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우아 이걸 어떻게 안 거야?

정말 놀랐다. 이렇게 명쾌하게 내 문제를 찾아냈다고? 

'학생들 가르치는 게 직업이라 그런지, 그 학생이 이해가 안 되면 내가 스트레스받더라고. 그래서 생긴 버릇이야. ' 


그 이후로,  원래 길을 잘 찾아서 '김네비'라고 불리는 김네비 씨는 내가 여행길에서 '절전모드'로 바뀔 즈음, 나의 길 안내까지 해주기 시작했다. 


'이 쪽으로 가면 다친다. 저쪽으로 가야 해.'

의도치 않게 쓰지 않아도 될 에너지까지 쓰게 만든 것 같아 정말 미안했지만. 정말 고마웠다.

내가 친구를 정말 잘 뒀다.  


그리고 여행 중간중간 

'나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다녀와~'

하고 친구들을 보내주고 앉아서 짐을 지키기도 했다. 간혹 귀여운 인형탈을 쓴 사람들이 지나가면 앉은자리에서 사진도 찍고, 허락된 시간을 충분히 즐겼다. 부상 이후 떨어진 체력으로, 전보다 빠르게 지치게 되었는데 ' 이 정도까지는 걸었었는데?' 하는 생각에 혼자 괴로워했었다. 부상이 없는 사람의 체력 기준에 억지로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행 착오가 꽤 있었는데  많이 발전했다. 


김네비 씨와 다른 친구들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싶었고, 또 정말 오랜만에 허락된 여행길을 즐기고 싶었다.  

부족함을 기댈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부족함을 기댈 수 있는 내가 되어서, 감사했다.  


 제라늄을 '일중독자' 또는 '완벽주의자'를 위한 향기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효율'도 좋고 '계획적인 것'도 좋다. 그러나 무엇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그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 지나치게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결국 나만 손해. 특히, 그 계획이 즐기기 위한 것인데 원하는 대로 운용이 되지 않아 힘들어한다면, 더더욱 '즐길만한 틈새'를 찾는 것에 소홀해지기 마련. 조금은 허술해지고 삶의 틈새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삶의 전반에서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철저히 계획하고 똑 부러지게 일을 처리하듯 살아가는 사람에게 '즐길만한' 빈틈'을 찾는 것이 어렵다. 조금은 허술해지고 삶의 빈틈을 만들어도, 생각보다 괜찮은 일들이 일어난다.


(Jessie)Jihyun Lee, Mindful Geranium, digital painting 2020



제라늄

완벽함이란 완벽하지 않음에서 균형을 찾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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