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
왜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채찍질하니?
눈물이 나고 온몸이 아파서 그림을 보기가 힘들구나.
무엇을 먹고살아야 할지, 내가 앓고 있는 오래된 우울의 근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든 것이 찬란하게 불안했던 20대 초반, 불안을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열심히 친구를 만나고 열심히 스펙 쌓기에 몰입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던 나는. 정성을 다해 무엇이든 열심히 하다 보면 이 불안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사람들 앞에서 이 모든 불안을 감추기 위해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노력까지 열심히 하다 보면 집에 오면 녹초가 되는 일들이 허다했다.
그때는 몰랐다. 무엇이든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도 우울증 증상 중에 하나였다는 것을.. 그리고 과도한 노력이 우울증에 좋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끊임없이 '난 할 수 있다!'를 되뇌며 이 또한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과도한 자기 확신과 함께 오늘도 나는 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분명 열심히 하면서 많은 성과를 이뤘고 상당히 생산적인 사람으로 비쳤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한 행복해지려고도 많은 노력을 쏟아붓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학부시절, 미술 이론 시간에 영감 가득한 비평가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몇 년 동안의 내 그림을 보고, 질문을 해오셨다.
"집에 화재가 난적이 있니?"
순간 무척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순간 반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소름 돋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내게 이런 말을 해주셨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채찍질하니?... 눈물이 나고 온몸이 아파서 그림을 보기가 힘들구나."
눈물이 찔끔했다. 누군가가 내 그림을 보고 감춰 둔 마음을 읽어준 경험을 한 것이 처음이었기에 그 말이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그분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리즈의 그림을 보시더니 그 교수님은 책 한 권을 추천해주셨다. '피로사회'라는 책이었다. 그 당시 막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라고 하셨다.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우리는 성과주의 사회를 살아간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사회는 '무한 긍정'을 개인의 성과를 위한 땔감으로 사용한다. 과거 규율 사회에서 개인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개인의 많은 부분이 억압되었으므로 개인은 분노와 히스테리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생산성도 낮았다. 그에 반해 자유로운 듯한 성과주의적 접근은 생산상을 높였고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는 듯했다. 성과를 위한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때문에 착취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그러나 더 치명적일 수 있다. 희생자 본인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라는 '과도한 긍정'은 개인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게 하고 개인의 역량 이상이 되는 목표치를 개인의 '창의성' 재량에 맡기며 21세기의 사람은 스스로의 노동 착취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착취하며 경주마같이 달려가게 된다. 사람들은 '번아웃' 상태로 달려가며 그 끝에 '우울'이라는 감정을 만나게 된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 것인가? 자유로움을 강요받는 것은 아닌가? '자유'로운 내가 '선택'한 행동들로 살아가며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착취하는 것은 아닌가? 성과사회에서 종종 우리는 '심심함'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상태에 죄의식을 느끼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다.
우울증은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이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중력이 없다.
우울증은 모든 관계의 유대성에서 잘려나간 상태로 고립으로 인한 자기 착취가 더욱 가속되는 상황이다. 끊임없이 자책하고 채찍질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디지털화로 더욱 가속화된다.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인류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타자성과 타자 저항성을 더욱 부족하게 만든다. 즉 디지털 공간에서는 건강한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세우기가 매우 어려워지는 것이다. 경계를 세우기가 어렵다는 것은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실재가 간강 한 저항성으로 건강한 자아 존재감을 지킬 수 있게 된다면 그 관계의 회복에 대한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착취하는 것은 아닌가? 성과사회에서 종종 우리는 '심심함'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상태에 죄의식을 느끼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다. 저자는 여기서 피로할 권리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너무 많은 과업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적어도 피로함을 느끼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Jessie Jihyun Lee, 매스미디어 명상 2-평온 속 불안 (Massmedia Meditation-Anxiety in Peace2), Acrylic on canvas, 145.5cm x 112.1cm, 2012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평화 속의 피로, 막간의 시간 속에서의 피로다.
그리고 그 시간은 평화로웠다. 또한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나의 피로가 때때로 찾아오는 평화에 함께 기여하는 듯이
보였다는 사실이다.
이 문장에서 사실 소름이 돋았다. 그림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강렬하게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불안'과 '공포'의 감정이 극에 달한 후 찰나에 잠깐 찾아오는 역설적인 '평화'의 감정, 그리고 화폭을 통해 사실 '평화'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극한의 검정은 때때로 '평화'가 주는 무안한 안도감에 더욱 보탬이 되곤 한다. 불안과 공포의 감정이 있기에 평화를 더욱 온전히 느낀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조금 느리게 현상을 보면 해답이 있다.
Jessie Jihyun Lee, 매스미디어 명상 3 (Massmedia Meditation-Anxiety in Peace2), Acrylic on canvas, 72.7cm x 60.6cm, 2012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었다.'
성과주의로 인해 소진해가는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당당하고 건강하게 피로함을 느끼며 '순수한 사유'의 활동이 필요하다. 저자는 가장 활동적인 활동이 될 수 있고 활동성 면에서 모든 활동을 능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활동은 성과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과열된 활동과 차이가 있다. 과열된 어떤 것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보는' 사유는 어쩌면 시쳇말로 하는 '멍'때리기와 비슷한 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문득 짧게 느껴지는 쉼표 같은 순수한 활동성은 '소진'으로 가는 현대인의 일상 길목에서 '쉼터'가 되어준다. 길지 않아도 일상의 길목에서 하게 되는 순수한 사유는 건강하게 피로를 느끼는 방법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활동은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유는 모든 활동적 삶의 활동 가운데서도 가장 활동적이며 순수한 활동성의 면에서 모든 활동을 능가한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성과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문장이었다. 과잉의 활동감 그러나 그 활동감은 본질적인 안정감을 주는 생동감이 아닌 것이다. 스스로의 방향성을 찾아 헤매던 와중, 어렴풋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스로 진정 살아있는 상태를 찾아 헤매는 여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