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종류
어떤 사람은 누군가가 내 말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위로를 받고, 또 어떤 사람은 감정을 알아주는 것 으로 위로를 받고, 또 어떤 사람은 해답을 내려주는 것에 위로를 받으며, 또 어떤 사람은 경험이 바탕이 된 결과에 위로를 받는다. 그렇다면 위로라는 것은 힘들어하는 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아닐까?
위로를 건네려다가 오히려 화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잘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잘 알지 못하면서 상대방의 감정을 가볍게 여기며 건네는 말이 바로 그런 것일 것이다. 내가 회사생활 중 A라는 사람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 남편은 왜 그런것에 스트레스를 받느냐고 가벼운 조언을 했다. 나는 내 고민을 가볍에 여기는 그 의 말에 순간 화가 났다. 나는 남편이 건넨 조언(?)을 이미 실행 해 보았고,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매우 빠르게 브리핑을 했다. 그제야 남편은 A가 정말 힘든 사람이구나를 동의해 주었다. 이런 과정이 말하는 대상으로 하여금 매우 기분나쁜 상황이 되는 것이다. 나의 말을 정확히 듣지 않았고, 상황을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면서 섣불리 답을 주려하는 것은 오만함이다. 그런 오만한 자에게 누구라도 고민을 털어놓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에는 그저 '공감'이면 좋지 않을까? 내가 A때문에 힘들다 한들 A를 퇴사시킬 것도 아니고 내가 퇴사할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사람에게 여기는 불편함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또는 벗어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도 좋겠지만, 관계 문제에 있어서는 섣부른 조언보다는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
'맞아,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
'아 그거 정말 화난다'
'은근히 열받게 하는 스타일이네?'등의 공감 말이다.
친한친구가 이혼을 하게 되었다. 아직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슬프게도 내 친구는 양육자가 되지 못했다. 친구는 양육자가 되지 못함에 많이 괴로워했다. 친구와 통화를 하고나면 감정이입이 잘 되는 나로서는 눈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지경이다. 하루는 통화를 하다가 곧 떨어질 아이 걱정과 그 아이에 대한 미래로 번뇌하는 친구에게 그 손을 놓으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법이 너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아이 아빠 또한 본인이 양육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데 친구가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본인의 감정만 힘들 뿐 상황이 좋아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효과적인 위로는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바로 내가 그녀의 아이와 비슷하다면 비슷한 상황이었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신것은 아니지만, 가정 형편 문제로 나는 조부모님 손에 자랐다. 하지만 엄마가 곁에 없다고 해서 내가 비뚤어지지는 않았다. 비뚤어질 아이면 친구가 곁에 있든 없든 상관없이 비뚤어질 일이다. 많은 위로에도 괴로움이 풀리지 않던 친구는 경험이 섞인 얘기에 바로 안도했다. 비용을 내고 상담을 다니는 곳보다 더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는 누가 함부로 친구의 마음을 안답시고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그러니 아무도 섣불리 위로를 건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만 내뱉는다고 풀릴 마음이 아니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그 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식에 대한 마음을 줄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냐만은 친구는 그녀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엄마로서의 역량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기로 했다.
'나도 그런 상황에 있어봤는데, 걱정하는 것만큼 나쁜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너는 이런 걱정을 하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간다고 해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최근에 강원도 영동지방에 산불이 크게 났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 뉴스를 보던 나는 불안한 감정에 휩싸였다. 세상에 재앙이 온 것처럼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불에 탄다면 뭐를 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너무 두려운 마음을 남편에게 공유했고 남편은 콧방귀를 끼며 "우리 삶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자신만만한 말을 했다. 나는 그 때 굉장히 안도했다.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 했다. 사실 맞는 말이다. 나무가 타들어가고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고, 산림이 타들어가는 것은 장기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겠지만 내가 지금 걱정하는 것처럼 단시간에 내게 무슨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 일이다.
8살 짜리 아이와 TV를 보다보면 환경보호 단체에서 바다의 동물들이 죽어간다는 CF를 송출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와 함께 보는 EBS에서 나오는 CF이기에 저렇게나 잔인한 장면을,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채널에 송출하는 게 너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이를 향해서 TV에 나오는 것들을 전부 믿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곤 한다. 물론 저렇게 죽어가는 물고기들도 물론 있겠지만, 모든 물고기들이 저런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처음 그 장면을 보면서 물고기 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생선을 먹지 않겠다고 하던 아이는 어느새 '모든 물고기가 다 저렇게 죽으면 내가 어떻게 지금 생선을 먹을 수가 있겠어?'하며 본인을 위로하는 말을 건네며며, 걱정을 차단하곤 한다. 내가 딱 그 상황이었지 싶다. 뉴스에 불타는 그 장면 하나만으로 마치 내 바로 앞에 불이 난 것처럼 걱정이 앞선 감정의 동요가 있었다. 나도, 아이도, 상대방의 현실자각 멘트로 감정이 누그러지며 마음의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짧고 강한 동요에는 오히려 깔끔하고 직설적인 현실 자각 멘트가 약이 되는 것 같다. (걱정이 큰 우리 모녀에게만 해당되는 위로일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잘하고 있어'
'사람은 다 똑같아'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위 멘트는 모두 감정과 분위기, 그리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말이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누군가로부터 따스함을 느끼는 데에 큰 위로를 받는 것 아닐까. 서로가 서로에게 흔한디 흔한 멘트로 따듯함과 위로를 나누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