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말이다.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은 비슷해 보이지만, 사전적으로 다른 의미의 단어이다. 고독은 다른 사람 혹은 사회와 접촉이 없이 혼자 있는 상태이고, 외로움은 홀로 되어 (이 부분은 고독과 비슷한 것 같다)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이다. 심리학적인 해석을 들여다보면 이 둘의 차이는 흥미로우면서도 더 명확해진다. 고독은 혼자 있지만 외롭지 않은 상태이다. 긍정적이고 건설적이다. 또한 고독에는 자신의 내면과의 소통이 들어있다. 외로움은 무언가를 잃은 아픈 느낌이다. 혼자 있을 때도 느끼지만 사람들과 있을 때도 느낄 수 있다. 외로움은 씁쓸한 느낌이다.
이렇게 짧게만 들여다보아도 고독은 선택으로, 외로움은 아픈 느낌으로 보인다. 그래서 였구나! 학창 시절 한 교수님이 “진정한 예술가가 되려면 고독과 친해질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덜컥 겁이 났다. ‘나 보고 외롭게 살라는 말씀인가?’하고 말이다. 실은 고독과 친해지는 것은 쓸쓸히 사는 것이 아니고, 깊은 내면의 성찰을 의미한다는 것을 한 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깊은 생각을 표현해내는 예술가는 고독을 통한 성찰이 꼭 필요했겠구나 싶다.
예술가에게만 그럴까? 마흔 또한 그렇다. 마흔은 고독에 자발적으로 다가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의 깊은 성장에 필요한 자발적인 선택. 글을 쓰면서 만난 한 선생님과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가끔 통화는 여러 깨달음을 준다. 한 참을 떠들다 “그러게요. 말이라는 게 다 이유가 있나 봐요. 그래서 ‘외로움은 달래고, 고독은 씹는다.’라는 표현이 있나 봐요.” 그러면 되겠다 싶다. 외로움을 잘 달래서 보내주고 고독을 꼭꼭 씹어 잘 소화하기. 이 정도면 마흔이 훌륭해지겠다 싶다.
‘외로움은 내면의 공허함이며, 고독은 내면의 충만함이다’라고 리처드 포스터 (Richard Foster)는 말한다. 고독은 내면을 공허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풍요롭게 가득 차오르게 한다. 고독이 이끄는 충만함은 내면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내면과의 소통이 잦아지면, 자연스레 생각은 정리가 된다. 내면을 돌아보면 마음에서 버릴 것과 간직할 것을 분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면에 버릴 것을 버리고 간직할 것을 소중하게 대하면 남겨둔 소중한 것들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렇다. 자신과의 소통은 내면을 충만하게 하고 깊고 여유로운 사람으로 성장시킨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용을 자신에게 베푸는 성숙함에 이른다.
고독의 선물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 ‘글쓰기’ 일 것이다. 주변에 마흔에 들어서서 글을 쓰기 시작하고 책을 출간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아마도 글쓰기가 이끌어 주는 내면과의 소통이 마흔에게는 간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홀로 앉아 내 생각을 쓰고, 내 마음을 쓰고 스스로 그 글을 읽고 점검한다. 타이핑을 치는 동안 나의 마음과 생각들은 글자로 바뀐다. 그리고는 고스란히 내게 읽힌다. 나의 내면의 이야기를 나 스스로가 읽어주었다는 것만으로 충만해지는 느낌. 홀로 앉아하는 일인데도 외롭 다기보다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마음이 든다. 나의 내면을 들어주기 시작하니, 외로움이 달래지고 아픔이 치유가 된다. 고독은 자연스러운 치유의 과정이기도 한가보다.
책장을 정리하다 보니 어린 시절에 써 놓은 일기가 하나 가득이다. 그때의 글들은 왜 그렇게 수다스러운지. 어디에 털어놓지도 못하는 말들을 하나 가득 적으면서 쾌감을 느꼈던 기억도 난다. 어쩌면 우리는 마흔에 고독을 만날 때 꼭 써먹어 보라고 초등학교 시절 일기 쓰기를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책 쓰기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마흔을 지나는 길목에 있다면 글쓰기는 권하고 싶다. 내면의 소리를 들어줄 때 마음이 다독여지고 충만해지는 경험이 주어질 것이다.
이런 고독을 멋들어지게 만났으면 좋았으련만은 나는 고독을 외로움을 통해 만났다. 외로움이 늘 컸다. 마흔이 오기 전에도 외로움이 컸다. 그 때문인 거 같다. 어릴 적 빨강머리 앤을 참 좋아했다. 20대가 되어서도 가장 좋아하는 책은 빨강머리 앤 이었다. 빨강머리 앤은 너무도 외로운 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항상 그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상상을 즐겨했다. 머릿속에 하나 가득 이야기를 지어내고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마흔을 지나면서 큰 외로움을 겪고 있던 어느 날. “마흔에도 스스로의 외로움에 대해 돌아보지 않는다면 무책임한 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나에게 어쩌라고 한 말은 아니고 대화 끝에 나온 이야기였지만, 꽤 충격적이었다. ‘내 인생을 내가 팽개쳤나? 나는 내가 외롭다고 할 때 스스로를 들어주지 않았나?’ ‘나는 무책임한가?’ 외로움이라는 것이 누가 들어준다고 사라질 것 같진 않았다. 그저 나는 적어도 나 자신의 외로움을 들어주어야겠노라 결심했다. 그때부터 한 것은 내 안에 외로움 비슷한 것이라도 올라오면 일단 멈추는 것.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묻고 감정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짧은 글 쓰기. 잠시 명상하기. 모두 외로움에서 시작되었지만 꽤 효과가 있었다. 나의 외로움을 들어주고자 선택한 고독이 마음을 다독여주기 시작했다.
고독은 선택이고, 외로움은 감정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외로움이 고독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세상에 그렇게 칼같이 외로움은 별로인 것, 고독은 멋진 것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내 마음의 느낌을 존중해주면 결국 다다르는 곳은 나를 성장시키는 곳이다. 나 자신과 스스로 연결되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운 존재가 아니다. 나의 외로움을 따라가 보자. 무엇을 잃었다고 느껴서냐고 물어봐 주자. 어쩌면 답도 없이 이유도 없이 그저 주저 않아있는 내면의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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