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물음표를 그리고 있는 듯한 그림자가 아주 서서히 움직여 이모가 있는 아파트까지 다다르는 동안 우리는 바닥에 앉아 말없이 무언가를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의사가 나오든 이모가 나오든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해원과 나는 말하는 법을 잃은 사람들처럼 그곳에서 침묵한 채 기다렸고, 그리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정영수의 <더 인간적인 말>은 크게 두 줄기의 갈등이 있다. 서로 다른 가치관 때문에 이혼까지 생각하는 '나'와 '해원'의 갈등과, 안락사를 하기 위해 스위스로 떠나려고 하는 연자이모와의 갈등이다.
칠흑같던 하늘이 파랗게 밝아올 때까지 이야기를 멈추지 못했던 해원과 '나'에게 대화는 '로맨틱한 놀이'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결론이 나지 않는 대화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을 고통스러워p3' 하며 상대의 주장을 짓누르고 차가운 말을 쏘아댄다. 말꼬리를 잡으며 늘어지는 싸움에 지친 둘은 어떤 합의점에 이른다.
더 이상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는 것.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은 곧 서로에 대한 '이해'를 멈춘다는 말이고 이해가 기반이 되지 않은 관계는 남과 다를바가 없다. 실질적으로는 남이 되었지만 아직 법적으로는 남이 되지 않은 둘은 서로 누가 먼저 나서주기를 기다리다가 의외의 사건을 맞딱뜨리게 된다.
'나'와 해원은 많은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지지않기 위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논리적인 우위에 서려고 했다. 관념적인 대화를 줄이라는 상담사의 조언에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대화는 '현실'이라고 한다. 그런 그들이 정말로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자부해왔던 '나'는 이모의 선택에 너무나도 보편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질문들을 한다. '엄마'가 한 행동과 '나'의 첫반응은 다르지 않았다는 말처럼 관념적인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 우리는 보편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인간적이다'라는 말은 두가지의 층위로 나뉜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타인에게 가질수 있는 연민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으로서,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충동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자살과는 사뭇 다르다)
이모가 안락사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외부적인 요인( 가령 '합리적인 사유는 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육체를 완벽히 통제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된다면p5)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선택한 죽음이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족이나 주변의 지인들이 이러한 죽음을 선택할 때 당신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받아들일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당신의 의견'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당신'이 사라지고 나면 존중받을 '당신의 의견' 또한 사라지고 만다.
아무리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기결정권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죽음'은 결코 본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만약 이모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갑작스럽게 목숨을 끊었다면 외부적인 요인에서 온 자살이 아닐지라도 이모의 결정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모는 모든 사람이 반대할 것을 알면서도 주변 사람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고 그들의 설득과 회유를 감내한다. 백게먼 게임처럼, 거스를 수 없는 운명같은 것이 있다고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말을 한다.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재밌는 건 이모의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는 없어도 존중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에게 막상 그런 일이 생기면 이해도 존중도 하고 싶지 않을 거라는 논리적인 모순이다. 아무리 윤리에 대해, 철학에 대해 밤새 떠들어 봐야 그것들이 '현실'이 되버리면 모든 이성적 판단은 흐려진다. 그리고 모든 일들은 그렇게 호락호락 이성의 범위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나'와 해원은 논리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더이상 '침묵'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일들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의심하는 것, 그것이 진짜 인간적인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