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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Dec 17. 2019

김혜진 <딸에 대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엄마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취직 때문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타향살이를 한 지 벌써 3년째에 접어든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미루다가 오랜만에 딸의 전화를 받는 엄마의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다. 엄마는 나에게 궁금한 게 많다.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지, 직장생활은 어떤지, 만나는 사람은 어떤지. 시기마다 사람이 하고 살아야 할 도리가 있다고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가 생각하는 어떤 시기와 도리를 놓쳐버릴까 봐 엄마는 가끔 불안해한다.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엄마 생각이 자주 났다. 나를 평균의 범주에 넣고자 부단히 애썼던 우리 엄마. 고등학생 때는 하교를 하면 엄마가 교문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고, 명절에는 불에 델까 봐 전도 못 부치게 하고, 과일도 예쁜 것만 골라 먹였다. 엄마는 나를 그렇게 키웠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서 벗어나야만 했다. 소설 속 ‘딸’이 아프리카로 떠난 것처럼.


이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엄마와 딸의 갈등은 나와 엄마의 갈등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지만, 아마 동성애자가 아닌 많은 딸들이 이 소설을 보면서 많은 부분에 공감할 것 같다. 이 소설은 동성애자 ‘딸’에 대한 이야기이자, ‘엄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엄마인 ‘그녀’는 자기보다 더 배운 딸이 자기보다 더 나은 남편을 만나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란다. 그것은 모든 부모라면 응당 품을만한 바람이지만 ‘딸’은 결코 ‘그녀’의 바람대로 살 수가 없다. ‘딸’이 동성애자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녀’의 바람대로 살았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딸’이 아프리카로 떠나겠다고 통보하듯이 알렸던 그때부터 ‘딸’은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녀’는 ‘딸’에게서 깊은 상실감과 배신감을 느낀다. ‘딸’이 동성애자임을 알기도 전에 엄마와 딸 사이의 갈등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끝이 없는 노동. ‘그녀’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을 항상 걱정한다. 많이 배운 자신의 딸이 제대로 된 직장 하나 없이 시간강사로 전전하는 모습에 죄책감마저 느낀다.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딸’이 노력이 부족한 탓도, 너무 많이 배운 탓도 아니다. 그건 ‘시대’의 문제이다. 성실하게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살아선, 길고 긴 노동에서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시대. ‘딸’은 그런 세상을 등지고 못 본 척하고 살아갈 수 없는 인물이다. 2층 부부의 다툼에 대해 남의 일이라고 구경만 하지 않는다. 부당하게 잘린 시간강사의 억울함을 못 본 척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딸’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길 바란다.


우리 엄마였어도 아마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하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재작년 겨울, 광화문에서는 길고 긴 촛불 시위가 있었다. 나도 몇 번 참석했다. 무언가 대단한 걸 하고자 나간 건 아니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모여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에 나도 있고 싶었다. 엄마에겐 가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그래도 걱정되는지 그런 위험한 곳엔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너까지 그런 곳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애지중지 길러낸 내가 혹시라도 어떤 사고라도 당할까 봐 나와 직접 관계되지 않은 일에 부당한 대우라도 받을까 봐 염려했다.


나는 그때 엄마를 어떻게 생각했나. 엄마와는 말이 안 통한다며 뒷방 늙은이 취급했던 건 아닐까. 엄마의 걱정을 사실 속으로 비웃진 않았나. 나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엄마는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엄마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엄마도 나와 같이 젊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너무나도 부당한 많은 것들을 경험해 왔을 것이다. 부당함에 앞서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나.


소설 속 ‘그녀’는 ‘젠’을 통해서 자신과 ‘딸’과 ‘레인’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나는 ‘젠’의 볼품없이 늙어버린 육신을 떠올린다. 그리고 활기차게 낯선 곳을 누비고 다녔을 건강한 두 다리를 생각한다. 한때는 누군가에게 존경받고 동경의 대상이었을 ‘젠’.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누군가를 돌봤을 그의 온전한 정신과 마음에 대해서도. 이제 ‘젠’은 가족 하나 없이 병실에 누워 돌봐주는 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슬픈 건 육신과 함께 늙어버린 정신이다. ‘젠’을 인터뷰하러 온 청년들이 무신경하게 그녀를 대하는 대목에선 화가 났다. 그들이 떠나고 ‘젠’을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의 삶을 더듬고 기억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그건 꽤 슬프다. 세상에 헌신한 그녀를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너무나도 가혹하지 않은가.


‘그녀’가 ‘딸’을 다그치며 가족에 집착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소중한 자기의 딸이 ‘젠’처럼 되버릴까 봐. ‘젠’처럼 훌륭한 일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바닥에 내다 버리다가 ‘젠’보다도 더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삶을 마감하게 될까 봐. 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후회하며 불행하다고 느낄까. 모르는 일이지만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어도 나중에 후회는 자연스럽게 따라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일들을 ‘젠’은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다. 부당한 것, 그래서 분노하게 하는 것, 심장을 뛰게 하는 것, 그래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부당한 해고에 대해 거리로 나가 옳지 못한 일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딸’의 행동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시위 현장에서 동성애에 대한 명백한 혐오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그녀’의 시선은 조금 달라진다. 그리고 치매 전문 요양 병원에서 ‘그녀’는 이전에 없던 일을 한다. 고분고분하게 있으라는 교수 부인의 충고에도 과장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그 결과는 일 밖으로 밀려나는 일이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모든 걸 이해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해해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니라 이 애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주는 것(p169)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엄마와 딸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엄마는 여전히 내가 도리를 다하며 평탄하게 살기를 바랄 테지만, 나는 지금의 내가 이끄는 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내 젊음을 낭비할 수 있다면 낭비하고 싶다. 
     
엄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어쩌면 또 싸울지도 모른다. 서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해야 한다. 기운이 있는 한 세상에 대한 부당함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고, 이해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엄마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야 한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 그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곳이 아님을. 기적 같은 이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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