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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Dec 10. 2019

황정은 <상류엔 맹금류>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나

우리가 좋은 사람들이고 누구에게도 악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웃음인 것 같았다. 그 비탈에서, 그 웃음이 점차로 사라지는 것을 나는 아주 이상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황정은의 소설 <상류엔 맹금류>의 첫 문장은 '나는 오래전에 제희와 헤어졌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문장은 마지막장에서 다시금 반복된다. 화자는 제희와 헤어질 무렵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제희의 가족들과 함께했던 나들이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무겁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모난 인물도 없다. 제희 부모님의 삶은 기구하지만 우리를 서글프게 만드는 건 그들의 지난 삶때문이 아니다.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의 순간에서 그들은 최선의 선택을 했다. 무엇이 최선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최악의 선택지(실향민으로 살아왔던 삶)을 제하고 나니 남은 선택지가 몇개 없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희의 부모님을 탓할 수가 없다. 자살까지 생각할만큼의 극한의 상황에서 그들은 '아이 다섯 가운데 누구도 흘리지 않고', '가족을 가족으로 유지한 것에 관한 자부'가 있을 수밖에 없다. 화자는 그러한 행동에 대해 '부도덕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짐을 지운 거라는 판단은 그녀가 사실은 제희의 가족과는 남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판단이다.


부모의 곁에서 그들의 억척스러운 삶을 봐왔던 제희는 부모의 삶을 감히 '판단'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제희는 '상황을 진정'시키고 다친 복사뼈를 부여잡고 '괜찮다'고 말하며, 가면 안되는 곳으로 걸어 내려가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체념'할 뿐이다. 버려졌다는 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도 제희를 탓할 수가 없는건 거기서 제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제희가 거기서 할 수 있는건 침묵과 체념뿐이다.


제희는 아마 그녀에게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좋은 연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지런하고 주어진 일을 필요 이상으로 꼼꼼하게 처리'했던 그의 아버지처럼 화자도 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아버지를 미워했던 것 처럼 제희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라면 그랬을 것 같다.


'전부 그가 자초한 거라고'


그녀는 음습한 물가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제희의 부모님을 바라보며 아무말 하지 못하는 제희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자기 부모님을 지켜보고 있'는 제희를 보며 화자는 마음이 아프다고 말한다. 오히려 원망은 제희를 아프게 하는 제희의 부모님에게 향해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못본 척 넘어가도 될만한 말을 꺼낸다. '거긴 똥물이었다고.' 힐난하는 어조로 말하고 만다.


소설의 끝은 먹먹하다. 수목원으로의 나들이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일까.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악인은 없고 상처받은 이들만 남아 있다.



* '...' 부분은 작품의 본문을 인용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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