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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Dec 06. 2019

정지아 <존재의 증명>

'꽃'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취향은 돈이 결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품격이 취향을 결정한다. 아니, 전제와 결론이 바뀌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다. 취향이 사람의 품격을 결정한다. 취향이 곧 사람의 본질인 것이다. 기억은 사라져도 취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게 그였다. 이토고 소파가 잠을 불렀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지아의 <존재의 증명>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취향'이라고 결론내린다. 취향이 곧 사람의 본질이며 기억은 사라져도 취향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존재가 단순히 물리적인 실존의 문제라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말소되지 않은 주민등록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존재의 유무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선 꽤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나'를 소개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딱뜨린다. 회사에서 업무차 만난 사람에게는 나의 직급을, 매번 명절마다 내가 누구의 몇째 딸인지 물어보는 큰할아버지에게는 나의 촌수를, 쓰레기를 버리고 있을 때 가끔 말을 거는 집주인 아저씨에게는 나의 호수를, 상황과 장소에 따라 나를 소개하는 말은 조금씩 달라진다. 나이를 먹을 수록 나를 둘러싼 관계망은 점점 복잡해지고 그럴 수록 나를 소개하는 말은 빈약해진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알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건 이름과 나이와 직업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는 시처럼, 나의 존재는 나를 호칭하는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러면 그 타인과 타인들은 무엇으로 구별되는가. 나는 그것이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취향은 나의 성격과 나의 취미와 나의 경제력까지 설명할 수 있다. 냉장고 안과 찬장 안을 채우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나의 옷장 안에 들어 있는 옷의 가짓수와 색상은 어떠한지, 나의 플레이리스트에는 어떤 노래가 들어 있는지, 나의 책장에는 어떤 분야가 많은지, 왓챠에서 5점짜리 영화는 무엇이 있는지, 뮤지컬과 연극과 전시회 중 선호하는 것은 무엇인지.

시간과 경제력에 따라 차곡차곡 쌓인 내 취향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경험이 더해져서 확장될 뿐. 지금 인디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해서 아이돌 음악을 좋아했던 내가 없어지는게 아니듯, 나의 취향은 잘게 뻗어 나간다.

내가 기억을 잃거나, 혹은 내가 죽어버려 정말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남는 것들은 누군가의 '기억'이거나 '유품'이 될 것이다. 죽은 자의 기억은 쉽게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내가 남기고 간 조악한 취향은 변하지 않는다.

나의 경제력 때문에 차마 채우지 못한 경험들도 기회비용을 고려해 선택된 것들이다. 만원이 있어 10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과 십만원이 있어 10개를 선택했을 때 나의 취향과 가까운 것은 만원쪽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가지지 못한 자의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때와 나의 선택에 행복함을 충분히 누리는 것은 별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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