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습관 018_2020.03.31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마냥 나에게 닥쳐온 변화에 무척이나 우울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으로 퇴사를 결심했고, 만나던 애인에겐 거의 차이다시피 헤어졌으며, 원하지 않게도 오랫동안 만났던 전 남자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됐다. 이 정도면 드라마라도 뻔한 클리셰라고 욕할 법한데 결정적으로 등장해야 할 구세주는 없었으니 내 살길은 나 스스로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더 좋은 회사에 취직하겠다는 자신감은 통장잔고와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고 구직사이트에 들락거리는 횟수만큼 불안감이 자랐다. 그럴 때 무조건적인 내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개똥도 약에 쓰려고 없다더니 개똥들은 모두 나를 떠나가 버렸다. 누군가 잘 될 거라고 말해줘도 내가 잘 되지 못할 이유를 100개쯤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나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겐 크게 티 내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했다. 무언가 속에서 차곡차곡 쌓이는 게 느껴지면 동생과 즉흥적으로 코인 노래방으로 향하곤 했다. (코로나 때문에 몇 달치 스트레스가 다시 쌓이고 있는 중이다) 오랜만에 옥상달빛의 ‘없는 게 메리트’를 불렀다. 노래가 이상하게 슬펐다. 대학생 때만 해도 이 노래는 밝고 신나는 노래였는데 이젠 그럴 수도 없는 게 젊음도 있다고 말하기 애매해졌기 때문이다.
없는 게 메리트라네 난
있는 게 젊음이라네 난
두 팔을 벌려
세상을 다 껴안고
난 달려갈 거야
직장도 없고 애인도 없고 젊음도 없고.
어쩌다가 서른에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런데도 노래는 밝아서 서러웠다. 없어서 메리트라는 우리들은 그래서 쉽게 착취당한다. 없는 건 아무리 봐도 메리트가 아닌데, 그때는 없다는 게 젊다는 말로 환원되는 것만 같아 괜한 자부심마저 생겼다. 양 손에 아무것도 쥔 게 없이 두 팔을 벌려 나갈 자신감으로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손해를 보더라도 가진 게 있는 쪽이 낫다는 걸 안다.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 역시 직장인이 되고 나서야 가사가 더 와 닿았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이 무력감에 빠질 때 실수한 것만 도드라지는 날이 있다. 지금이야 사람이 살면서 실수도 할 수 있지, 하는 배짱이 생겼지만 신입일 때는 작은 실수에도 밤잠을 설쳤다. 정말이지 아무도 관심 없는 나의 슬픔에 수고했다고 위로를 전하는 따뜻한 목소리에 오늘 하루를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
정답을 알긴 할까
힘든 일은
왜 한 번에 일어날까
-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그래도 이제 취직을 했으니 없었던 것 중에 하나가 생겼다. 막막했던 날들이 지나갔다. 패딩 안에 얇은 와이셔츠를 입고 오들오들 떨며 면접을 보던 날들도 지나갔다. 오늘은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왔다. 걷는 길을 따라 벚꽃이 곳곳에 만개해 어딘가 마음속 깊은 곳이 간질거렸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볼륨을 한껏 높여 음악을 들으며 벚꽃 길을 걸었다. 마스크를 끼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우울했던 시간을 견뎌냈던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어 졌다.
벌써 3월이 다 가버렸다.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갔다. 지나고 생각하니 그 해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봄이 되어서야 그렇게 말할 수 있다.